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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이 백제를 멸하러 '황해' 건넜나?

해양대제국 백제의 활동무대는 중국의 산동성이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5/08 [17:37]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러 '황해' 건넜나?

해양대제국 백제의 활동무대는 중국의 산동성이다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5/08 [17:37]
아래 글은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0265&section=section78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의 왕도 부여"의 2부입니다. 연결해서 읽으셔야 이해가 됩니다. 

고대중국의 수도가 서부산악지대인 이유

아래 필자의 글을 확실히 이해하려면 대략적인 중국 고대국가의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한다. 고대 중국의 수도는 주로 서안과 낙양으로 서부 산악지대에 있다. 낙양이 동부 평야지대에서 서부 산악지대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왜 고대 중국은 동부의 넓고도 넓은 평야지대를 놔두고 서부 산악지대에 수도를 둔 것일까? 산악지대가 평야지대보다 살기 좋아서일까?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동부 평야지대에는 동이(東夷 우리 민족)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감히 평야로 나오지 못하고 산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고대중국인들은 산적(山賊)이라고나 할까? 중국이 동부평야지대로 나온 것은 신라와 대진국이 망하고 난 뒤였다. 그 정도로 우리 삼국은 막강했기에 중국은 감히 동부평야지대를 넘보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삼국이 존재할 때 중국은 5호16국이 끝나고 남북조시대로 들어간다. 그 남북조시대의 북조(北朝)의 최강국은 북위였다. 그 북위의 수도도 역시 산악지대로 산서성 대동시와 하남성 낙양이었다. 북위는 수십만 기병으로 5차례나 동부평야지대인 백제를 공격했으나 동성대왕에게 완패하여 결국 패망의 길로 접어든다. 이것이 불과 백제 패망 170년 전의 일이다.

▲  남북조시대 북조의 북위도 산적 신세였다. 동부의 넓은 평야지대로 나오려고 동성대왕과 5차례 전쟁을 했지만 모두  패해 결국 산 속에서 패망하고 만다. 동부평야지대를 지배한 동성대왕이 파견한 7태수들.
한반도 백제가 황해를 건너가 이렇게 큰 식민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북위는 수십만 기병으로 백제를 공격했다. 그것을 격퇴시키려면 거의 대등한 병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병력이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갔다는 것이 말이 되는지? 그 때 충청도와 전라도의 인구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분명 백제는 대륙에 있었고, 주 무대는 산동성이었다.

중국 25사의 하나인 <남제서>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강시단야(僵屍丹野) : 북위의 시체가 들에 깔리고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 즉 북위의 처참한 패배를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는 남제서의 일부 내용(15줄 324자)이 지워져 있다. 거기에는 더 엄청난 기록이 들어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고의로 그 기록을 지운 것으로 보인다. 무슨 내용인지는 중국학자만 알고 현재 아무도 모른다. 

▲   남제서의 일부 내용이 지워져 있다. 중국은 왜 이 기록을 고의로 삭제했을까? '강시단야'라는 표현까지 쓴 남제서가 왜 무슨 기록이 여기에 있길래 이랬을까? 뭔가 엄청난 비밀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당나라도 선비족으로 다 같은 단군의 후손으로 고구려와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룬다. 한 핏줄이다 보니 하늘에 태양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로 자웅을 겨루자고 수.당이 단군의 적장자국(嫡長子國)인 고구려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그것이 명분이었지 특별한 이유가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수나라의 수도는 하남성 낙양이고, 당나라의 수도는 섬서성 장안이었다. 왜 그들은 평야지대로 못 나오고 산속에 갇혀 있었을까?

그건 바로 고구려만큼이나 강력했던 백제 때문이다. 중국은 평야지대로 나오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으나 힘이 약해 그러질 못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인들은 산 위에서 본 선망의 대상인 넓은 지역을 다 바다(海)로 보았다. 海는 글자 그대로 바다일 수도 있으나, 큰 강, 큰 호수, 큰 평야를 바다(海)로 쓰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X海란 지방이 중국에 여러 곳에 있고, 그냥 海라는 육지지명도 있다. 백제와 관련되는 사서에 나와 있는 海의 의미를 정확히 설명하기 위함이다. 

고대 중국에는 해전 기록과 유명한 수군장수가 없다. 그건 중국이 바다를 접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연의의 적벽대전은 허구의 소설이지 그런 역사 기록은 없다. 적벽은 양자강 중류에 있고, 거기가 위.오.촉 삼국의 격전지였다. 그 동쪽의 평야지대에는 우리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국본기>로 본 백제의 최후

의자왕 16년(656년)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이 목숨을 걸고 의자왕에게 간한다. “(전략) 반드시 난리가 있을 겁니다. 무릇 용병하는 법은 반드시 그 지형을 살펴 택해야 하는 것이니, 강의 상류로 나가서 적을 대항해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타국의 군사가 들어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을 들어서게 하지 말며, 그 요새(혐애)를 의지하여 막아야 합니다(據其險隘以禦之).”

성충은 분명 강의 상류로 나가 적과 싸우라 했는데, 현 국사이론대로라면 백마강의 상류로 가서 적과 싸우란 말이다. 소정방이 배를 타고 부여를 오려면 분명 하류로부터 거슬러 올라 와야 하는데 왜 성충은 강의 상류로 나가서 적을 대항해야 이길 수 있다 했을까?  이 한마디만 들어도 성충이 말한 강은 부여의 백마강이 아니고 부여는 백제의 수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  기벌포를 금강 하구 장항으로 비정한 식민사학계. 장항이 군사적 요새인지 묻고 싶다.
게다가 적의 수군은 요새 즉 험애(險隘)인 기벌포의 언덕을 들어서게 못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요새인 기벌포의 언덕이라 함은 바다 포구가 아니고 강에 있는 포구로 봐야 한다. 바다 포구 옆에도 언덕이 있을 수는 있으나, 강 포구 옆에 언덕이 있을 확률이 훨씬 높다. 그리고 성충은 기벌포의 언덕이 험애(險隘) 즉 요새라고  말하고 있다.  

사학계는 기벌포를 장항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필자는 장항이 천연적인 요새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나라 서해안 포구에 요새가 있을 수 있는 확률은 전무하다. 왜냐하면 요새란 반드시 험한 산이 있고 천연적인 지형지물인 협곡(峽谷)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경새재(조령) 정도는 되어야 요새란 소릴 듣는다. 높은 산도 없는 서해안 바닷가가 요새가 될 수는 없다. 장항을 기벌포로 비정한 식민사학계의 거짓말이 도가 지나칠 정도이다. 

현 사학계의 이론대로 백제 땅인 충청도 전라도 서해안에 요새가 될만한 높은 산과 깊은 협곡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 산동성은 그 유명한 태산(泰山)을 비롯해 험한 산과 호수가 많은 지역이다. 충신 성충의 이야기 한마디만 들어봐도 백제의 무대는 한반도가 아니라 산동성 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다음은 현 삼국사기 번역문이다. 소정방은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서쪽 덕물도에 도착하니(蘇定方引軍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신라왕이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병 5만을 거느리고 백제로 가게 하였다. 좌평이 아뢰길 “당병은 멀리 바다를 건너와 병났고(唐病遠涉溟海) 물에 익숙하지 못한 자는 배에 머물러 있는 동안 피곤해져 있으니(不習水者在船必困) 그들이 육지에 내리어 사기가 오르기 전에 급히 들이치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 대목은 “당나라는 협주(莢州)를 떠나 전선을 거느리고 동(백제)을 향하여 물길을 따라 내려왔다.”라는 <신라국본기>와 내용이 많이 다르다. 분명 <신라국본기>에는 바다가 아니라 물길(강)을 따라 동으로 내려 왔다고 했다. 그러나 <백제국본기>에 바다를 건너왔다는 말이 있어, 사학계는 이를 근거로 황해바다 건너 한반도에 백제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두 기록이 다르다는 것은 어느 기록 하나는 위작이란 말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지라 누가 위작을 했건 위작을 하려면 어느 기록을 고쳐야 했는지는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다. 만일 어느 하나가 위작이라면 <백제국본기>가 위작인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위작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蘇定方引軍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는 소정방이 성산,제해(지명)에서 나라 서쪽 덕물도까지 군을 이끌었다.”로 해석을 할 수 있다. 성산과 제해 둘 다 지명으로 볼 수도 있고, 성이 있는 산인 제해지방에서로 번역할 수도 있다. 성산제해는 <신라국본기>의 협주(莢州)보다 더 서쪽에 있거나 가까운 지방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섭명해(涉溟海)를 바다를 건넜다고 해석하지 않고, 큰 평야인 溟海라는 지역을 지났다로 해석을 할 수 있다. 그 근거는 걸어서 지난다는 섭(涉)자이다. 진짜 바다를 배로 건넜다면 굳이 걸어서 건넌다는 섭(涉)이란 한자를 쓸 하등의 이유가 없다. 바다를 걸어서 건널 수는 없지 않은가??? 고대 중국인들은 큰 평야도 바다로 표현했다.

그리고 불습수자(不習者)라는 문구는 강물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말이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말로 해석하기는 지나친 면이 있다. 진짜 바다라면 불습해자(不習者)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문장 그대로라면 당나라 군대는 처음부터 배를 타고 온 것이 아니고, 먼저 명해 지방을 멀리 걸어 와 병이 났고 다음에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온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하면 신라국본기와 해석이 거의 같아진다. 그래서 필자는 <백제국본기>는 위작이 아니라 다른 표현을 쓴 것으로 보는 것이다. 본 해석대로라면 백제의 무대는 분명 한반도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한반도에 없었다는 다른 근거도 많으니 여기에 집착할 필요 없이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  평원, 동평, 황산, 백마강, 사수 등이 패망시 지명. 부흥운동의 중심인 주류성도 보인다. 동평은 치우천자의 능이 있는 곳으로 도독부가 설치된 곳.
 
계속해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흥수가 의자왕에게 말하기를 “당군은 (생략) 신라와 더불어 기각(掎角:기병)이 되었으니, 만약 평원(平原:지명) 광야에서 대진한다면 승패를 알 수 없습니다.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우리나라의 요긴한 길목입니다. (생략) 당병은 백강을 들어서지 못하게 하고 신라병은 탄현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며 (후략)”라고 고한다.

그러자 대신들이 말하기를 “(전략)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게 하더라도 물결따라 내려오는 것이어서 여러 배를 나란히 하여 오지 못할 것이며, 신라군을 탄현에 오르게 하더라도 지름길을 경유하는 것이어서 여러 말을 나란히 하여 오지 못할 것입니다. (후략)”이라고 반대의견을 내던 중, 이미 적이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5천 병사와 함께 계백장군을 급히 황산으로 보낸 것이다. 식민사학계는 황산을 논산으로 비정했다. 과연 그럴까?

여기서 흥수와 다른 대신이 아주 중요한 말을 했다. 바로 “백강은 도성(都城)의 요긴한 길목이고, 백강에 들어서더라도 물결 따라 내려온다.”라는 대목인데 현 부여의 백마강은 흥수와 대신의 말과 많이 다르다. 우선 길목이라 함은 백강과 도성과는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을 말함인데 현재의 백마강은 부여의 바로 옆을 휘감아 돌아 흐른다. 이 백마강이 어떻게 요긴한 길목이란 말인가?

그리고 백마강은 백강에 들어와 물결 따라 내려오는 강이 아니다. 이 말은 백강은 다른 강과 연결된 강이란 말이며, 분리되어서는 내려오는 강물인 것이다. 그래서 성충이 “강 상류로 가서 대항하라”고 의자왕에게 충언한 것으로 본다. 성충이 말한 강이 백강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여하튼 부여의 백마강은 그런 강이 아니다. 소정방은 분명 바다에서 백마강 하류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했다. 이는 흥수와 대신이 의자왕에게 고하는 사서의 기록과 다르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부여가 사비성이라면, 소정방의 병력을 막으려면 하류에서 막아야 할 것이라고 해야지 왜 상류를 막아야한다고 성충이 말했을까? 성충이 잘못 말한 건지 현 부여의 백마강이 틀린 건지 머리 좋은 독자는 금방 이해했을 것이다.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부여 백마강이 가짜인 것이다. 산동성 백마하(白馬河)는 사하(泗河)에서 분리되어 내려오다 독산호수로 들어가는 강이다. 사서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강이다.  
 
▲  산동성 백마하는 사수에서 분리되어 흐르다 독산호수로 들어가는 강으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리고 당군이 이미 백강을 지났기 때문에 계백을 황산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백강과 사비성 중간에 황산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쪽인 논산(황산)을 지나야 서쪽인 부여(사비)로 들어갈 수 있으며, 사비 서쪽에 백강(백마강)이 바로 옆으로 흘러  현재의 지형은 사서 기록과 전혀 안 맞다.

현재 사학계에서 설정한 백마강과 논산과 부여의 위치가 역사기록과 엇박자가 난다. 즉 백강, 황산, 사비 순으로 지형이 놓여 있어야 하는데, 서쪽에서부터 백마강(백강), 부여(사비), 논산(황산) 순으로 놓여있다. 이건 삼국사기 기록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여러가지 이유로 분명 부여는 원래 백제의 수도가 아니고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의 가짜 왕도이고, 진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은 중국 산동성에 있는 것이다.

결국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도망갔다 나와서 항복하고 22담로를 설치한 해양대제국 백제는 쓰러졌다. 당시 백제는 막강했었으나 방심하다 상대의 기습공격에 수도가 졸지에 함락당하고 왕이 항복해서 순식간에 나라가 망한 것이다. 권투로 비유하자면 무하마드 알리가 빠른 발로 다가가 휘두른 강펀치에 턱을 정통으로 맞아 한방에 K.O 되는 조지 포먼과 같은 신세였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백제는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호가 있었고,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連) 덕안(德安)에 다섯 도독부를 두었다. (백제의 인구에 대해서는 나중에 3부에서 다시 언급한다). 덕안은 양자강 이남 강서성에 있고 나머지는 산동성에 있는 지명이다. 

이후 백제는 부여풍 복신 흑치상지 등이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왜까지 동원된 백제부흥운동은 백제와 왜의 연합군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겨루는 국제전이 된다. 이 부흥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파병한다. 이 당나라 40만 대군이 역시 배타고 황해바다 건너 한반도에 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로 정신병자로 봐야한다. 왜냐하면 이런 대군이 배타고 황해바다를 절대로 건너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배 만 척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우기는 사람들을 위해 아래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  식민사학계의 이론은 당나라가 황해바다를 건너 한반도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얘긴데 글쎄요? 건널 수 있을까요?
 
소정방은 과연 황해바다를 건너 왔을까?

필자는 중국에 갈 때 배 타고 가길 좋아한다. 선박으로 갈 수 없는 곳이라면 모를까 웬만해선 배를 이용한다. 배 여행은 편하고 나름대로 운치가 있기 때문이다. 항상 모든 배는 밤을 끼고 달린다. 배를 타면 저녁식사를 하고 독주를 마시고 잠을 청한다. 잠자리가 바뀌어 잠이 안 오는 경우도 있지만, 근본 이유는 파도에 울렁거리는 배 멀미를 안 느끼기 위해서이다. 파도가 높은 날에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질 때도 있고, 비위가 약한 사람은 구토하기 예사이다.

정용석씨가 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국대륙을 지배했다>라는 책 124쪽에 보면 황해바다 해류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중간 중간 생략하고 요점만 말하자면, “인천과 청도를 항해하는 1만 톤급 뉴 골든 브리지(New Golden Bridge)란 동력선이 있는데 청도까지 21시간이 걸린다. 이러한 대형 선박도 대륙연안의 급 해류 지역에서 ‘걸프 스트림’을 만나면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심하게 요동을 치며 항로를 유지하려고 사력을 다한다. 이곳뿐만 아니라 급 해류 해역에서의 항해는 이러한 현상이 일반적이다. 중국의 연안해류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데(한국의 연안해류도 같은 방향) 평균 유속은 0.5~0.6m/초 정도이다...(이하 생략)” 
 
▲  황해의 해류도. 청색은 육지쪽의 연안해류이고, 적색은 바다 가운데 주 해류다. 연안해류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주해류는 남에서 북으로 거꾸로 흐른다. 산동반도 앞바다는 주해류와 연안해류가 만나는 곳으로 바닷물이 빙글빙글 도는 곳이다. 여기를 중국형 목선으로 돛과 노도 없이 도만 가지고 황해를 건넜다는 것은 정신병자들이 하는 소리다.

참고로 위의 해류 사진을 보면 바다 한 가운데 황해바다의 주 해류(빨간 선)는 남에서 북으로 올라 흐르고, 그 해류가 발해만으로 들어갔다 돌아 나와 중국과 한국의 연안해류(청색 선)로 이어져 내려온다. 주 해류의 유속은 중국연안 해류의 몇 배나 된다. 이러한 해류들은 만조나 간조 시간에 특히 심하게 움직인다.

가장 물살이 강한 곳이 대련과 연태사이의 바다이고, 다음이 위해 앞바다로 육지간의 거리가 좁아지다 보니 발해만으로 들어가는 주 해류와 나오는 연안해류가 만나 뒤엉키는 곳이다. 해서 21세기인 지금도 대련과 연태를 오고가는 쾌속선은 사고가 잘 나고, 배타고 온 사람들은 항상 배 멀미를 심하게 해 초죽음이 되어 도착한다. 이러한 급해류 지역을 1,350년 전에 목선으로 횡단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해류의 방향과 속도는 같다고 봐야 한다. 기존 식민사학계는 당나라 소정방이 13만 대군으로 1만 척의 배로 황해를 건너 한반도 백제로 갔다고 쉽게 말하고 있다. 그 때는 철 동력선이 아니고 목선인데, 그런 배로 중국대륙연안 해류와 황해바다 주 해류를 횡단해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거짓말은 지금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과연 중국 배가 황해를 횡단할 수 있었을까? 


▲  중국의 배들은 6 종류로 모두 도형강선으로 황해횡단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돛도 없이 보트식 도를 저어
▲   해류가 급격한 황해를 횡단하여 건널 수는 없다.  이는 윤모교수의 뗏목탐험으로 이미 입증되었다.

고대 중국의 배 모양은 위 사진과 같이 대개 6 종류로 나뉜다. 이런 배의 형태는 B.C 500년 ~ A.D 1,621년까지 지속되는데, 한결같이 돛이 없고 보트형 도(櫂)를 장착하고 있다. 이런 배를 도형강선(櫂型江船)이라 한다. 이는 중국은 강에서만 배를 운영했지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필자가 맨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은 역사적으로 서부 산악지대에 있었기에 바다 항해가 필요 없었던 것을 증명한다 하겠다. 

중국의 <무비지>에 따르면 중국 수군을 대표하는 누선의 경우에도 “만약 바람을 만나면 인력으로 능히 제어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櫂)형을 가진 배는 아무리 커도 연안 항해만 가능하지 횡단항해가 불가능한 법이다. 중국의 전선은 주로 정크선이나 판옥선(누선)과 같은 배로 대부분 돛이 없고 보트식으로 양쪽에서 도를 젓는 식이다. 만일 소정방이 산동성에서 이런 배로 출발했다면 당나라 군대 13만은 아마 전부 연안해류를 따라 남쪽으로 표류되었거나 수장되었다고 봐야한다.

백제가 22담로를 건설한 해양대제국이 된 것은 보트식 도(櫂)가 아닌 우리식의 노(櫓)를 발명해 노형해선(櫓型海船)의 형태였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우리식 노에다 돛을 달면 장거리 횡단 항해도 가능하다. 돛과 키와 우리식 노를 사용하여 아라비아까지 간 조상(백제)의 슬기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러나 중국 배는 우리 것과 많이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다를 끼고 대륙 동쪽에 살았던 민족이고, 중국은 고대부터 산악지대에서 바다 구경을 못한 민족이었다. 중국인들은 진짜 바다가 아닌 큰 평야, 큰 강, 큰 호수 등을 바다라고 불렀을 정도로 생선이 잡히는 바다를 동경하고 또 바다가 뭔지도 모르는 우매한 산적(山賊)일 뿐이었다.  

그들의 배들은 바다에서 싸우는 해전(海戰)이 아니라, 강에서 싸우는 수전(水戰)용 배이다. 그래서 사진처럼 돛이 없고 보트식 도인 것이다. 보트식 도는 강에서나 통하지 바다에 나오면 무용지물인 것이다. 게다가 중국 배는 돛도 없는데 어떻게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단 말인가? 돛도 없이 도를 저어 황해바다를 횡단할 수 있다고 보는지? 중국인들은 팔 힘이 무척 강했나보다!!!

이렇게 바다에 열악한 중국배로 황해바다를 건너오려면 해류를 3번 지나야 한다. 하나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중국연안해류요, 둘째는 황해바다 가운데에서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주 해류이다. 세 번째는 한반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연안해류이다. (참고로 중국의 연안해류는 한반도연안해류보다 강하다) 황해를 횡단하려면 해류가 내려갔다, 올라가고, 다시 내려간다. 그리고 해류가 만나는 곳에서는 바닷물이 빙글빙글 돈다. 이런 해류를 헤치고 황해를 횡단할 배가 당시에 중국에 있었다고 보시는지!!!

하물며 현대의 철 동력선이 연안해류에서 ‘걸프스트림’을 만나도 안간힘을 쓰는데, 1,350년 전의 중국의 목선이 버틸 수 있겠는가? 만일 황해 한 가운데에서 사나운 주 해류를 만나고 바람까지 불어 파도까지 높으면 전원 수장(水葬)이지 달리 방법이 없다. 그리고 옛날에는 지금처럼 기상 예측을 못하고 통신도 발달하지 않았던 때이다.

고려 때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 하다가 2번이나 실패한 것도 태풍(神風) 때문이라고 하지만 현해탄의 울렁이는 해류도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만큼 바다를 건너는 원정은 무섭고 겁나는 것이다. 부산과 일본 사이의 바다보다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황해바다가 훨씬 거리가 길고 해류가 강하고 변화가 심하다.

소정방 13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오려면 배가 몇 척이 필요한지 계산을 해보자. 원래 전투 병력이 100이라면 지원 병력은 200인 법이다. 소정방이 바다를 건너 올 수 있는지는 고대전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일언지하에 불가능이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한 일본군 10만이 조선에 올 때 700척으로 6번에 나누어 왔다. 그것은 병력을 수송할 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현대전에서도 상륙작전은 몇 번에 나누어 실시한다. 수송선이 모자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6.25 때 한반도의 허리를 끊은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수송선은 261척에 한번에 병력 25,000명을 3번에 걸쳐 실어 상륙시켰다.

현실이 이러한데,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가 13만 대군과 지원부대를 배 만 척에 실어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보냈다는 사학계의 이론은 소설과 같은 이야기이다. 게다가 백제부흥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파병했는데, 이 40만 대군이 배를 타고 황해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은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과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인 주류성과 임존성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식민사학자들은 떠들고 있다. 이게 과연 가능한 지 살펴보기로 하자.

(1) 김성호씨의 설에 의하면
연안항해(바다에 인접한) 능력 및 강상항해(양자강, 황하)능력에 능했던 중국민족이 이정도의 규모로 한반도로 올 수 있었는가?  

(2) 윤O철씨의 의견도
기록이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혀, 육전이 아닌 수군의 동원은 어렵다는 의견을 밝혔다. (뗏목탐험으로 유명한 분. 필자는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지리비정이 잘못된 것으로 본다.)  

(3) 고대전쟁사를 연구하는 군사학자들도
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의견을 말하고 있다. 즉 군사 40만이 오기위해서는 수많은 보급품(군량미, 말, 각종무기)이 동시에 수송이 되어야 전쟁수행이 가능한데, 그 당시 정황으로 도저히 맞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사의 기록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지리 비정을 엉터리로 해 해석이 잘못된 것인가? 과연 소정방과 김유신이 백제와 전쟁을 벌인 곳은 한반도인가 중국대륙인가? 아래에서 조금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 전함의 최대승선 가능인원(최대인원 추정)을 최대 약100명과 50명으로 추정 시

(소정방) : 당군 13만 / 100명 =  1,300척 ~ 2,600척 = 당군 13만 / 50명
(부흥군) : 당군 40만 / 100명 =  4,000척 ~ 8,000척 = 당군 40만 / 50명 

과연 이 규모의 배가 산둥반도에서 금강하구로 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전투병력 말고 지원부대(말,무기,식량,수레)까지 합치면 2~3배의 배가 필요한데 그게 과연 가능했다고 보는지. 세계 어디 해전사에도 이런 병력이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이만 척이 넘는 배로 40만 대군이 황해 바다를 건넜다고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태연히 말하고 있으니 정말로 기가 찰 노릇이다. 

설사 그런 숫자의 배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엄청난 대군을 전혀 가 보지도 않은 바닷길로 배를 태워 보낸다는 것을 허락할 왕이나 지휘관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13만 ~ 40 만 전투 병력이면 국가 전투력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걸 하룻밤 사이에 전원 물귀신을 만들지도 모를 무모한 작전을 진행할 지휘관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소정방과 당 고종이 머리가 돌지 않고서야 40만 대군더러 도형강선(櫂型江船)인 배를 타고 황해 바다를 건너라는 명령을 내릴 리가 상식적으로 없는 것이다. 

웬만큼 상식이 통하는 말을 해야지, 그런 병력이 황해 바다를 횡단하여 건너왔다고 태연히 말하는 식민사학자들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횡단이 어려우면 연안으로 붙어 돌아올 수도 있다고 억지를 부릴 사학자도 있을 것이나,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연안을 따라 오려면 고구려 앞바다를 지나와야 하는데 고구려 수군은 낮잠을 자고 있었는지 되묻고 싶다.

식민사학자들이 중국 가는 배를 한 번 타보면 다시는 그런 말을 못할 것이다. 백제는 분명 산동성에 있었고, 소정방은 황해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다. 중국 배는 죽어도 황해바다를 횡단할 수가 없는 도형강선(櫂型江船)이라고 이미 설명했다. 모든 기록과 정황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즉 백제의 멸망은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작은 보트같은 배에 나누어 싣고 강물을 따라 기습 침투작전을 폈기 때문으로 보인다. 22담로까지 해외에 건설한 강력한 해양대제국 백제의 해군과 소정방 군대와의 해전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하겠다. 즉 백제는 한반도에 없었고 중국 대륙 산동성에 있었던 것이다. 

▲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과학으로도 입증되었다. 백제 일식의 최적관측지는 북경 부근. 북경은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곳이고, 부분일식까지 보는 지역은 넓어진다. 백제의 부분 일식은 한반도에서도 볼 수 있으나, 신라의 일식은 2개나 한반도에서 전혀 볼 수 없다.  따라서 신라와 백제는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륙에 잇었던 것이다. 
 
패망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 이외에도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다음 3부 연재에는 “흑치상지의 백제부흥 운동과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다른 증거들”에 대한 글이 실립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북브레이크뉴스 송기옥(향토사학자) 칼럼니스트의 지난  4월 30일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의 최후", 성훈 칼럼니스트의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 왕도는 '부여'"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기사와 함께 싣게 되었으며, 1만명이 넘는 독자들이 참여하여 좋은 의견을 주셨습니다.
 
오늘 (5월 8일)브레이크뉴스 송기옥 칼럼니스트 글(기사 작성은 5월 4일)과 본지 성훈 칼럼니스트의 글 2부. 그리고 양지환씨가 기고한 "백제 수도는 서울? 동방의 로마제국"  을 동시에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나아가 많은 의견을 내주시어 바른 역사찾기에 국민 모두가 동참하도록 널리 알려야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성훈 칼럼리스트 08/05/09 [00:18] 수정 삭제  
  백제 패망 후 당나라는 5 도독부를 설치합니다. 지명은 맞습니다만, 동명은 치우천자의 능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죄송합니다. 동평을 착각했습니다) 그리고 다 산동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덕안은 산동성 아래 강소성에 있습니다.
백제 패망지 지명 대부분을 김부식은 모르는 지명에 적어 놓았습니다. 김부식을 포함한 고려의 10대 석학이 한반도에 있는 지명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는 백제패망지가 당시 고려가 있던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이기 때문에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제 시대 때 갑자기 부여가 백제의 왕도가 되었습니다.
윤복현 08/05/09 [05:53] 수정 삭제  
  해상제국 백제가 동남아시아와 일본열도까지 경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는 반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중국대륙에서 땅먹기만 한 백제라면 해상제국이라는 닉네임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노저어서 건너겠습니까? 돛달고 큰 바람타고 가는 것입니다. 노는 필요시만 젖겠지요. 근초고왕.근구수왕 등이 일찍이 진출한 중국동남해 지역이 백제땅이였으니 한반도본국의 지명들을 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명만을 가지고 주장하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고고학적으로도 뒷받침이 되야 하는 것입니다. 개로왕이 강을 따라 토성을 쌓았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유적지의 경우 한강이남의 풍납토성이 고증하고 있습니다. 백제초기 교류했던 동진의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고, 침류왕 시절의 사찰터도 최근에 발굴되었습니다.

온조백제는 [한단고기]나[삼국사기]에 보면 공통적으로 "서해로 바다를 접하고 있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 서쪽에 어디에 바다에 있습니까? 지중해까지 가야 한다면 그건 비약이구요. 서해는 중국위치로는 동해요, 한반도위치로는 황해입니다. 중국위치로 기록했다면 동해라고 했겠지요?

그리고, [비류백제가 땅를 가지고 온조백제로 귀순했다]는 [한단고기-고구려본기]의 기록에서 '땅'은 비류가 고구려에 대항하다가 만주에서 밀려난 중국대륙(요서)으로 보아야 합니다. 전연에 대패하여 위축된 비류백제세력이 온조백제에 합류한 기록이라고 보아야 하고, 여기서도 서해를 건너 온조백제까지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아마도 마한에 밀붙어 마한왕에게 조공까지 하면서 겨우 살아가던 온조백제가 갑자기 강성해진 근초고왕시대로 보아야 합니다. 근초고왕시기에 마한전역을 복속했으니까요. 여기서 마한은 단군3조선 중 한반도지역에 해당하는 마한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삼국지-동이지전]에 기록을 보면 지금의 읍단위 정도에 해당하는 소국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 마한50여개국에 '백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백제는 온조백제입니다.

이 온조백제가 갑자기 강성해져 마한전역을 복속하는 시기가 근초고왕시기니 이 때 비류백제가 합류한 것이 정확한 것입니다. 온조백제와 비류백제가 통합한 이후 본격적으로 중국진출에 나섰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조세력(십제)이 한강변으로 이동해 오기 전에 소서노가 비류.온조와 함께 남하하여 일시 정착한 지역이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 의하면 "남쪽으로 내려와 땅이 좋고 살기 좋은 패수....진.번 사이에 있고, 북쪽으로는 대수, 서쪽으로 바다로 접해 있는..바다와 가까운 외진 지역"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곳은 아래 지도속의 위치처럼 지금의 발해만 지역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비류는 어머니 소서노가 정착한 발해만 지역에서 왕위에 즉위하지만,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소수만 발해만(만주지역)지역에 남고, 대다수는 나머지는 온조를 따라 남하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류는 만주에서 고구려에 저항하면서 세력을 키워 부여까지 서쪽으로 밀어내기도 하다가 결국 고구려와 전연에 패하여 요서지역으로 밀려난 것으로 보이며, 결국 전연에 대패하여 온조백제에 합류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 소서노가 비류.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정착한 곳으로 추정되는 패수지역 -
[한단고기-고구려본기]"진.번 사이,바다와 가까운 외진 곳,북쪽이 대수('대수'라는 지명은 엄리대수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큰 강"으로 해석하면 무난할 듯),서쪽이 바다"인 위치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남쪽"이라고 했으니 지금의 만주 집안은 고구려의 초기 수도가 아니다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즉, 집안지역의 피라미드 무덤군들은 고구려 유적이 아니라는 의미와 동일하죠.중국이 고구려유적지로 왜곡함으로써 홍산문명에 앞선 백두산문명(중국은 '여명문화'라 부르고 있다)의 진실을 감추려는 것이죠..또한 연대가 올라갈수록 세계최대 최초의 유적유물들을 보유하고 있는 한반도문명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북한 예성강.대동강 지역에서 백제관련 토성과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어 온조가 남하하여 초기수도를 정한 지역이 대동강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는데, 고구려의 남하로 인하여 북에서 계속 남으로 수도를 정한 온조백제였다는 점에서 보면 일리가 있어 논쟁이 야기되기도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비류는 만주에 남았고, 온조는 비류.소서노와 발해만 지역(패수)에 함께 있다가 비류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남하하여 한반도지역에 속하는 마한지역에다가 십제를 건국했고, 비류백제는 고구려에 저항하여 만주에서 요서까지 밀려나 결국 전연에 대패하여 근초고왕시기에 온조백제에 합류하게 되었고, 비류계의 북방 군사력을 기반으로 갑자기 강성해진 백제가 근초고왕시기에 마한전역을 통일하고 중국과 동남아, 그리고 일본열도까지 지배하게 되는 강성한 해양제국으로 발전했다는 점입니다.


성훈님의 열정적인 연구는 가상하오나, 너무 문헌에만 치중한 듯한 관념적인 연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고학과 문헌들과의 검증분석이 함께 동반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한반도을 제외하고 지나치게 중국대륙에다만 고정시키려는 편향성이 문헌을 바로보는 관점도 흐리게 하지 않나 싶습니다. 한반도와 중국을 하나로 보는 역사인식이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땅속에서 출토된 무녕왕 지석에 표기된 사망일시와 [사마]라는 이름이 삼국사기의 기록과 상호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편향성은 객관성을 결여한 역사연구라고 보고 싶군요. 동성왕과 무녕왕의 나이차이로 보아서 결코 아들관계가 될 수 없음에도 부자관계로 보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벌써 연구의 문제점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三國史記, 魏書, 宋書, 日本書紀를 비교해 보면, 개로왕은 동생 곤지(여곤)에게 병권을, 여도(문주왕)에게는 국무총리(상좌평)직을 맡겼습니다.그리고 고구려에 한성이 점령당하고 죽음을 당한 개로왕이 개로왕의 친아들인 무녕왕(사마)를 임신한 왕비를 곤지에게 맡기게 되고, 동생 여도(문주왕)는 백제재건을 맡았습니다. 평소 위급해져 가는 백제정국상황에서 개로왕이 평소 동생들에게 부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무녕왕을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한 건 백제 개로왕 당시 북방족의 풍습인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우가 데리고 살아야 하는 풍습"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유교학자 김부식의 입장에서는 유교적인 관점에서 용납할 수 없어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문헌가지고는 진실을 알 수 없고, 같은 사건과 상황을 기록한 문헌내용들을 비교분석해서 공통적인 내용을 진실로 보아야 하는 차원에서 무녕왕은 사촌형제사이인 동성왕의 아들이 아니라, 개로왕의 아들입니다.

40세에 왕위에 오른 무녕왕(462년 - 523년)과 15세에 왕위에 올라(일본서기 기록) 22년간 재위(재위 479~501년)한 동성왕의 나이 차이는 동성왕의 재위년인 479에서 15을 빼면 출생연도가 464년 되니 2살 차이입니다. 동성왕이 2살때 무녕왕을 낳았다는 소리밖에 안되니 부자관계는 전혀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로왕의 아들 사마가 일본 '각리섬'에서 출생한 2년후에 동성왕이 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곤지의 형님되는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이 15세에 암살당하자, 곤지의 양아들이자. 곤지의 형 개로왕의 아들인 사마보다는 곤지자신의 친아들(동성왕)을 왕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때의 상황을 [일본서기]는 日本書紀는 동성황제의 즉위에 대해 “무령왕(사마)의 아버지 곤지는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그의 차남인 동성왕의 경우 큰 아버지 문주왕의 아들인 三斤王(삼근왕)이 재위 3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왜국의 군사 500명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선박 모형도(돛을 달고 있다)
 

장보고의 무역선 모형도(돛을 달고 있다)
 
서양배: http://www.kordi.re.kr/chongseo/vol8/vol8_03.asp
한국배 :http://www.kordi.re.kr/chongseo/vol8/vol8_04_02.asp
 
* 서양배나 한국배 모두 돛을 달고 있다..
기본사항이다! 어찌 노를 저어서 먼 바다로 나서겠나!
고대부터 개척된 해로와 해풍을 최대한 이용하는 거다!
해성동자 08/05/09 [07:57] 수정 삭제  
  조재범 (2008-05-08 21:57:36)

잘 읽었습니다. 아, 그런데 다 좋은데 실수를 하나 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백제 5도독부의 위치입니다. 일단 그 도독부는 동명, 덕안, 웅진, 금련, 마한입니다. 지금 그 도독부 중에서 금련과 마한의 위치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중국엔 동명과 덕안이 두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습니다. 동명은 성훈씨 말대로 산동성에 있지만 덕안은 강서성에 있습니다. 제가 얼마전에 발행된 중국 전도에서 확인했습니다. 웅진은 지금의 비성이라는 것도 덧붙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구당서에 웅진의 동쪽엔 대산이 있다는 기록을 가지고 비정하면 됩니다.
그리고 백제 패망시 지명 중엔 삼국유명미상지방도 들어가 있다고 덧붙여주십시오. 침현,독산,평원,동잠성,덕안 등은 전부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정성일 (2008-05-09 06:59:50)

저 또한 산동지역에 백제의 속국이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중국25사에도 나오는 내용을 부정할 생각은 없구요.
다만 백제의 멸망시의 도읍인 웅진과 사비를 멸하기 위해 황해를 건넜냐가 문제입니다.
성훈 선생님 말씀대로 황해의 해류가 매우 위험하다는 의미를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백제는 어떻게 그런 위험한 해류를 사이에 두고 동백제와 서백제를 경영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먼저 답하셔야 할 것입니다.
백제의 항해술을 뛰어나 바다항해가 가능하고 중국은 바다항해가 불가능하다고만 주장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중국이 백제의 조선기술자를 고용하여 배를 만들고 유능한 선원을 앞장 세워서 바다를 건넜다고 하면 어떻게 변명하실 것인지 묻고 싶네요.
남당 선생의 강역고는 남당 선생의 주장이 적힌 주관적인 글이나 백제의 마지막 도읍에 대하여 비정한 이유에 대하여 10여가지 항목으로 정리하신 글이 있더군요.
중국의 황제나 군사의 지휘관이 자칫하면 전 군사를 바다에 생매장할 지도 모를 모험을 하였겠느냐에 대해서는 이전에 수와 당나라의 전쟁시에 육로를 통하여 공격하러 왔다가 매번 큰 패배를 당하고 돌아간 경험이 있습니다.
육로로 전쟁을 하면 백제와 고구려 연합군을 상대해야 하니 수로를 통해 상대적으로 약한 백제와 1:1 승부를 하러왔다고 봅니다.
전쟁의 신은 불행히도 우리에게 있지 않고 중원에게 도움을 준 듯합니다.
중국이 백제를 멸망시킬때는 13만의 병력을, 부흥운동을 저지할 때는 40만의 병력을 백제에 보냈다는 기록을 보면 결코 백제의 국력이 낮은 나라가 아니었으며 백제의 멸망은 빈틈을 찔렸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고 봅니다.
라디오 08/05/09 [08:35] 수정 삭제  
  온조 백제니 비류 백제니..김성호님의 가설따위는 믿지 않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가 46년간 재위했다고 나오나..
백제왕기에서는 비류가 17년, 온조가 30년 재위했다고 나옵니다.
온조가 47년 재위했다고 나오는 기사도 포함되어 있지요.
3개의 출처가 다른 기사가 섞여서 기재되어 있습니다.
한 나라에 2개의 왕조가 성립되지 않는 것은 상식입니다.
분명히 구지왕처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왕들중 몇 왕들은 기록에서 누락되었다고 봅니다. 50여년이란 재위기간은 믿기가 힘듭니다.
서용석 08/05/09 [13:36] 수정 삭제  
  그리고 인류시조성전건립추진위원회 위원으로 글을 남깁니다.
우리의 역사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왜곡된 역사는 후손들이 그 거짓된 역사를 보고 배우기 전에 기필코 바꿔야 합니다.
조재범 08/05/09 [20:45] 수정 삭제  
  윤복현씨, 서해로 바다를 접하고 있다의 그 바다는 바다란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큰 땅도 바다 해를 씁니다. 그것은 옥편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로왕이 강을 따라 쌓은 것은 제방이지 성이 아닙니다. 성은 따로 쌓은 것인데, 사서 좀 읽어보시죠. 증토축성이란 말만 듣고 토성이라 생각하시나본데, 토성은 말 그대로 흙을 말려 쌓은 것이고, 증토축성이란 흙을 구워 쌓은 것, 즉 흙 벽돌로 쌓은 것을 말합니다. 말린 것과 구운 것도 구분 못 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삼국사기 기록을 봅시다.
"하수(河水)를 따라 제방을 쌓되 사성(蛇城)의 동에서 숭산(崇山)의 북까지였다."
여기서 하수란 한강이 아닙니다. 하라고 칭하는 강은 한반도엔 못 붙입니다. 하는 흐름이 ㄱ자나 ㄷ자로 굴절이 심한 강을 하라고 하거나 중국 화북지방에서 붙이는 강이름인데 한반도는 이런 강이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숭산은 삼국유명미상지방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백제 본국이 한반도요, 백제 속주가 중국이다라고 할 수 있겠소?
그리고 일본서기를 자꾸 들먹이는데 왜 삼국사기는 내팽개치고 일본서기만을 숭상하는 지 알 수가 없군요. 우리 역사는 우리 민족이 쓴 사서가 가장 믿을만합니다. 일본서기는 대체로 2운 즉, 두 갑자인 120년이 소급되어 적혀있을 뿐만 아니라 670년 이전의 역사는 대체로 전설이 반이상 섞인 허구입니다. 신공황후조가 대표적이죠.
그리고 내친 김에 무령왕릉에 대해서 반박 좀 해야겠습니다. 무령왕릉에 적힌 사마(斯麻)는 무령왕의 실제 휘인 사마(斯摩)와 다릅니다. 뻑하면 이것은 이두표기다 뭐다 하는데 한 예로 듭시다. 제 이름인 재범은 같은 한자를 쓰는 다른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른 한자를 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자를 써도 다른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하물며 마자 한 자 다른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리고 사망시기인 523년 5월도 따져봅시다. 삼국사기엔 무령왕이 5월에 죽었다고 했지 5월 7일에 죽었다고 안했습니다. 설령 무령왕이 5월 7일에 죽었다 치더라도 같은 날 죽었다고 다 같은 사람입니까? 이름도 다른데. 게다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편부터 의자왕 편까지 다 뒤져보시죠. 백제 역대 왕 중에서 장지가 적힌 왕이 의자왕 말고 누가 있는가?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왕 중에서 나이 적힌 사람 다 뒤져보시죠. 역시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동성왕이 37세에 죽었다는 것도 일본서기를 보고 짐작하는 것이지 실제론 모릅니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이 고의로 백제 역대 왕들의 나이를 안 적었겠습니까? 고의로 역대 왕들의 장지를 안 적었겠습니까? 진실은 하나입니다. 김부식이 몰라서 안 적은 겁니다. 기록도 찾을 수 없고 실제 장지도 못 찾으니까 몰라서 안 적은 겁니다.
그리고 왕릉의 특성이 뭔지 아세요? 왕릉 주위엔 절대 묘가 인접해 있지 않습니다. 즉, 왕릉이 축조되면 다른 무덤은 꽤 먼 거리로 떨어뜨려 만든단 말입니다. 그런데 무령왕릉은 반경 20m내에 무령왕릉을 비롯해서 3개의 무덤이 인접해 있습니다. 왕릉이 분명하다면 어떤 미친 놈이 그 주위에 무덤을 만듭니까? 또 왕릉엔 휘를 절대 쓸 수 없습니다. 반드시 시호를 써야합니다. 이는 정조 대왕 무덤에 이산의 묘다라고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무령왕의 혈연 관계는 일본서기에선 곤지의 아들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우리 삼국사기에선 곤지의 손자라 합니다. 어느 것이 신빙성 있어보입니까? 일본서기가 더 믿음직합니까, 삼국사기가 더 믿음직합니까?
구당서에 이르기를 '백제의 왕 거소는 동서 2곳에 있었다'하니 충청도 지역의 백제 유물들은 동쪽 거소의 것일테고, 무령왕릉의 주인은 분봉왕인 사마왕입니다. 또한 우리는 웅진의 개명된 것이 공주로 알고 있는데 부탁합니다. 삼국사기 한번 제대로 정독해 주십시오. 웅진의 새 이름은 공주가 아니라 분주(分州)입니다. 또한 역시 구당서에서 웅진의 동쪽엔 대산이 있다 했는데 공주 동쪽에 대산(大山)이란 것이 있습디까? 대산은 태산의 옛 이름입니다.
위험한 황해 해류를 이기고 어떻게 동백제 서백제를 운영했나? 이건 저도 답은 속시원히 못 하겠습니다만, 제가 알기로 산동반도를 기준으로 해류의 성질이 조금 달라집니다. 산동반도 북쪽인 발해만 일대는 동북아시아 전역을 통틀어 가장 해류가 빠른 지역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연안 해류 때문이지요. 발해만 일대를 보시면 압니다. 아주 큰 만인데 만이 있다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곶입니다. 곶 주위는 해류가 엄청 빠릅니다. 그래서 발해만 일대가 아주 위험하다는 것이죠. 사서의 기록을 기존의 통념대로 해석한 위 지도에서 나온 그 항로, 그 항로가 바로 자살 행위하는 항로란 말입니다. 그러나, 산동반도 남쪽과 강소성 지역에서 출발하면 괜찮습니다. 한 예로 상하이 지역 가는 배는 그다지 위험한 항로가 아니라고 합니다. 백제가 동백제 서백제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다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해로가 어느 쪽은 위험하고 어느 쪽은 안전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안전한 항로만을 이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천문학 외에도 기상학, 지질학이 입증해주기도 합니다. 백제의 큰물기록을 솔직히 한번이라도 추적해보셨습니까? 백제의 큰물 시기는 음력 5월~6월입니다. 여기서 한반도의 큰물시기도 한번 알아보죠. 음력 6월~7월입니다. 큰물 시기는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 쯤은 잘 알고 있겠죠? 동북아시아 각 지역의 기상 관측소에서 나온 자료에 따르면 음력 5월에 큰물이 지는 지역은 산동반도 남부~양쯔강 이남 지역, 일본 큐슈, 오키나와 지역이라 합니다. 한반도에선 이례적인 일이 아니면 잘 안 일어나요. 또 백제의 지진 기록은 17회인데 그 중 4회가 강진입니다. 한국은 지진대가 지나가는 곳도 아니라서 강진이 안 일어납니다. 1979년의 홍성 지진도 리히터 규모 5.9라서 강진 기준인 7.0에 못 미칩니다. 그런데 백제의 지진 기록 중엔 땅이 갈라지고, 집이 무너져 죽는 사람이 있었다는 둥의 엄청난 강진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땅 갈라지는 지진은 한반도에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기록들은 온조왕, 다루왕, 기루왕, 근구수왕 때 있었습니다. 설마 이 것을 보고도 근초고왕 때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다는 케케묵은 주장은 안 하시겠죠?
고고학적인 유물 사관을 지금 중국 땅에선 할 수 없다는 현실도 감안합시다. 우리는 약 1000년 전인 고려시대에 그 지역의 영토를 상실해버렸기 때문에 그 사이에 저 극악무도한 서토인들이 상당부분 파괴하고 없애버렸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한 1949년에 대만 초대 총통 장제스가 국민당 정부를 중국에서 대만으로 옮길 때 가져간 유물이 자그마치 62만 여점인데 그 중에 우리 민족 계열이 만든 유물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보매, 사서의 기록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이 유물이라고 봅니다. 한예로 가야 유물이라고 떠들어대는 경상도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 중 상당수는 '한국고대금석문'에서도 제작연대가 불분명하여 이것이 정말 가야 것인지는 알 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윤복현 씨, 중국대륙에서 땅따먹기 했다고 왜 해상제국이란 칭호를 못 얻습니까? 꼭 반도나 섬나라에 있어야만 해상제국이란 칭호를 얻습니까? 중국대륙에서 땅따먹기한 것은 그 주위에 고구려와 신라가 있으니까 그 나라들 간의 전쟁이고, 해상제국은 해양으로 진출한 것 뿐입니다.
피닉스 08/05/09 [22:04] 수정 삭제  
  삼국 사기 인용문에서,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의 서쪽" 덕물도에 도착하니... 인데, 나라의 서쪽을 빠뜨리셨네요. 즉, 덕물도는 백제국의 서쪽에 있어야 맞는 거죠. 그리고 제가 무슨 일제 사학의 관점을 가진게 아니라, 그냥 한문만 해석하면, 원래의 글이 자연스럽습니다. 명해는 지명이 아니라, 그냥 바답니다. 불습수자에서 水는 그냥 바다를 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럼 조선의 水軍은 해군으로 해야하나요? 水는 광범위하게 물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강이든 바다든 모두 "물" 입니다. 그 사람들이 물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강 이든 바다든 물에서 싸울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해를 건너 백제를 치는 입장에서는 해군이 아닌 육군이 주력이 됩니다. 적벽대전이 실사는 아니라 하더라도 물에 익숙하지 않는 병사를 위해 배를 요동치지 않게 다 묶었다는 얘기는 그들이 얼마나 "물"에 잇굿하지 않았는지를 보려줍니다.
조재범 08/05/09 [22:37] 수정 삭제  
  일제 사학의 관점을 가지셨다뇨? 아닙니다. 오히려 님께서 잘 지적하셨습니다. 명해는 지명도 아니고 바다도 아닙니다. 바다라면 건널 섭자를 쓸 수는 없습니다. 섭자는 건너다는 뜻이지만 이상하게 물에 관련된 것에선 쓰진 않습니다. 이는 큰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바다 해(海)는 바다란 뜻 외에도 땅이란 뜻이 있습니다. 수군은 말 그대로 수군이죠. 바다에서 전쟁해도 수군이고 강 위에서 전쟁해도 수군이죠. 위의 배 모양을 통해서 볼 때도 중국인들은 항해술이 그다지 능하진 못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성일 님의 의견에도 한 가지 반박을 하죠. 그 유능한 선원이 몇 명이나 될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격군으로 모두 선원을 유능한 자로 쓴 들 어쩌겠습니까? 본래 물에 익숙치 못한 것들인데. 그리고 가해조천록을 아십니까? 이것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안경이란 사람이 지은 것인데요. 이 사람이 1621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체험했던 것을 쓴 것입니다. 이 당시에 중국으로 사신을 갈 때는 반드시 육로를 이용했습니다. 해로가 원체 위험했기 때문이죠. 서울에서 북경까지 해로로 간다면 좋든 싫든 발해만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건 지도만 봐도 아니까 생략하죠. 어쨌든 육로를 이용했는데, 그 당시에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심양에 도읍하고 후금을 세우면서 요동반도 지역이 막혀서 육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해로를 이용하기로 하고 청천강에서 등주(산동성 봉래시)까지 10척의 배로 가도록 했는데, 이 항로를 이용하는 데만도 1개월이 넘게 소요되었으며, 9척이 파선되어 단 한 척만이 중국에 올 수 있었답니다. 중국인보다 상대적으로 바다와 더 잘 접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이 해로를 이용해도 이 정도인데, 중국인들 중에서 유능한 선원을 고용한들 피해 한 번 고스란히 안 입고 바다를 건널 수 있겠습니까? 설령 수전을 했다면 강 위 쯤이 그나마 적당하겠죠. 그러나 강 위에서 일어났다는 적벽대전을 볼 때도 중국인들은 그 강상 항해도 그닥 잘 하진 못 했나 봅니다. 당연하죠. 그네들의 수도가 있었던 장안 일대는 강의 상류 지역이라 강 폭도 좁고 해서 물이 많지 않겠죠? 그러니까 그들이 수전에 서툴단 말이 나온 것입니다. 정성일 씨, 반도 사관에 못 박혀 있으면 해석이 안 맞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고려 이전까지는요. 한 번쯤은 역발상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중립사학 08/05/10 [20:27] 수정 삭제  
  아니 서해바다를 왜 못건넙니까?
고대사람들이 무슨 원시인입니까?
군사동원된 사람수가 위작일 가능성은 왜 배제합니까?

이거 완전 사학이 아니라 소설이군요.
성훈씨의 주장대로라면,
백제와 신라와의 전쟁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님이 그린 백제와 신라의 지도에서 두 나라는 완전히 떨어져 있고, 바다를 건너야 전쟁이 가능한데,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와 신라가 무자게 전쟁하더군요.

님 말대로라면 해류때문에 신라와 왜와의 교류도 불가능하고 지나와 왜와의 교류도 불가능하군요. 백제와 왜는 어떻게 교류를 했나요? 해류때문에 안될텐데. 이상해도 한참 이상합니다.

서해바다를 못건넜다는 것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억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솔직히 님이 고대 항해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얇은 지식으로 고대인을 원시인으로 만들지 마십쇼.
성훈 칼럼리스트 08/05/10 [23:21] 수정 삭제  
  백제와 신라는 떨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 대륙에서 붙어 있었고, 신라와 왜도 중국 대륙에서 붙어 있었습니다. (박창범교수의 일식기록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문장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함부로 댓글을 다는 것은 경솔한 짓입니다.
황해바다를 중국 산적들이 못 건넜다는 것이지 백제가 못 건넜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제대로 읽고 댓글을 달아야 필자도 신경써서 볼텐데 이런 댓글은 시비걸기용으로 사실 답을 할 필요조차 없는 글입니다.
dfsdfs 08/05/16 [18:17]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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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짱 08/07/09 [17:15] 수정 삭제  
  말하는 요지를 보니 이제 갓 대학이나 졸업했나 보구려~ 흥분하지 말고 성훈님의 글을 전반적으로 잘 읽어보고 그동안 배운것과 좋합적으로 사고를 해 보게나~ 세상은 그리 일방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성훈님,조재범님 같은 분들이 너만 못해서 인고에 인고를 해가면서 이렇게 민족을 위한 기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성의만이라도 인정해보게.. 그런 막말이나 하면서 하세월 하지말고 진정한 공부(예,지,인을 겸비한)를 더하게! 비록 조상중 누군가 친일사학이라 중립을 추구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욕할 수는 없는 입장은 이해하네!
도사 09/07/14 [05:22] 수정 삭제  
  정림사지 오층탑에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고 쓴글이있읍니다. 그것이가짜가 아니라면 백제가 부여에서 멸망한 확실한근거가 아니겠어요.
heye 09/12/17 [11:07] 수정 삭제  
 
방문자 10/12/16 [11:02] 수정 삭제  
  이 분의 글을 읽고 글을 올립니다.

저 위에서 윤복현 님이 올린 글 중에서는 '당나라는 바다도 못 건너는데 백제는 어떻

게그랬냐' 하시는데 이유는 백제가 해양대제국으로 불린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한마디로 하면 백제같은 해양 대제국이나 이렇게 배를타고 대륙에 영역을 건설하는게

가능하지 원래 당나라 원족인 한족은 내륙에 살아서 동이족에 비해 훨씬 해군이 약합

니다.

그리고 대륙백제설 이미 정설된지 오래입니다.

이분이 말씀하신대로 한반도사관과 식민사관에 박혀 우리역사를 가리는 그늘이 되어

선조들에게 부끄러운 후손,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선조가 되는 우를 범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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