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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 왕도는 '부여'

[충격]한순간에 사라진 해양대제국 백제의 패망지는 중국 산동성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4/30 [16:04]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 왕도는 '부여'

[충격]한순간에 사라진 해양대제국 백제의 패망지는 중국 산동성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4/30 [16:04]
본 글은 장문이라 다음과 같이 3부로 나누어 연재됩니다.
(1부) 일제가 조작한 백제의 왕도 부여
(2부) 소정방은 황해를 건너왔을까?
(3부) 백제멸망과 흑치상지의 부흥운동

인기가수 주현미가‘쌍쌍파티’로 가요계에 데뷔하면서 불러 히트한 노래가 있는데 제목이 <백마강>이다. 그 가사는 아래와 같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철갑옷에 맺은 이별 목메어 울면
계백장군 삼척님은 임 사랑도 끊었구나
아~ 오천결사 피를 흘린 황산벌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칠백년의 한이 맺힌 물새가 날면
일편단심 목숨 끊은 남치마가 애닯구나
아~ 낙화삼천 몸을 던진 백마강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위 노래는 나당연합군에게 마지막 수도 사비성에서 패망하는 백제를 그린 노래로 애절함이 서려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항상 심금을 울리게 만든다. 그것이 주현미라는 가수의 노래솜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라 잃은 망국의 아픔이 절절이 서려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과연 백제가 패망한 사비성은 과연 충남 부여가 맞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이 노래 가사에는 백제 패망시의 중요한 지명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백마강황산벌이다. 그 곳이 어디인지 하나하나 검토해 보기로 하자.

▲  부여의 낙화암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 원래 금강의 지류인데 부여 근처에 와서 역사적으로만 백마강으로 둔갑한다.

전 문화재청장과 일본인이 답사한 부여는 백제의 왕도인가?

아래는 전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씨의 베스트셀러였던 기행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 329쪽에 나와 있는 문장이다.

(인용) 부여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원 세상에, 부여가 이렇게 작을 수 있어요?”

“아니, 부여가 아직까지 읍이었단 말예요?”

“아직도 관광호텔 하나 없다고요?”


부여는 정말로 작은 읍이다. 인구 3만 명에 시가지라고 해야 사방 1Km도 안되는 소읍이다. 그래서 가람 이병도선생도 <낙화암>이라는 기행문에서 부여의 첫 인상을 “이것이 과연 고도(古都) 부여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허망부터 말했다. 부여에 대한 이런 허망은 어쩌면 우리 머리 속에 은연중  들어앉은 부여에 대한 환상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부여는 백제의 123년간 도읍지로 백제 왕도의 유적이 있으리라 기대해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부여에 당도해 보면 왕도의 위용은커녕 조그만 시골 읍내의 퇴락한 풍광뿐인 것이다. (인용 끝)

일본인들은 백제가 일본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백제의 고도였다고 하는 한성(서울), 웅진(공주), 사비(부여)에 관심이 아주 많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전부 실망한다. 해양대제국 백제의 고도가 너무 형편없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적 느낌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풍납토성, 공주, 부여가 백제의 왕도로 조작된 도시이기 때문이다. 일제 때인 1937년 일본인이 쓴 기행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인용)“정작 부여에 도착하니 시가지라고 하는 것이 함석지붕과 나무판자집들이 두 블럭 정도 줄지어 있는 것이 전부였고 그 안쪽으로는 울타리도 없는 초가지붕에 박이 널려있는 평범한 시골풍경뿐이어서 도저히 자신이 생각한 부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부여를 다녀온 뒤 그가 다시 친구들을 만나서 부여를 가본 적이 있느냐 물으니 모두들 아직 못 가봤다고 대답해서 또 한 번 놀랐다고 했다. 부여는 이처럼 가보지 않은 자에게는 환상을, 가본 자게는 실망을 주는 곳으로 어떤 답사객은 “꼭 네다바이 당한 것 같다.”고 까지 했다.”  

현재 부여에 가서 백제 유적으로 만나는 것은  오직 정림사 오층석탑 하나뿐이다. 또 있다면 반은 뭉개진 해발 100m의 부소산과 가난한 물줄기의 백마강가의 낙화암이 있을 뿐이다. (중략) 그래서 부여에 오면 우선 부소산에 올라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거지같은 전설의 절벽과 백마강을 내려다보고, 고란사에 가서 고란초라도 봐야 부여에 다녀왔다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부소산에 오르는 사람은 또다시 부여를 욕되게 말할 지도 모른다. 엉겹결에 보는 낙화암은 그 스케일이 전설에 어림없고, 고란사는 초라한 암자로 절 맛이 전혀 없으며, 부소산성이라는 것은 말이 산성이지 뒷동산 언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게 잔망스러워서 무슨 전설과 역사를 여기다 갖다 붙인 것이 가당치 않다는 생각이 절로 날 것이다. (인용 끝)

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적답사기>란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세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문화유적을 관광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꼭 이 책이 들려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전문가의 눈에도 “부여는 과연 백제의 왕도인가?”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고 했다.

▲  식민사관에 의해 철저히 조작되어 있는 부여의 유적지들. 저렇게 좁은 곳이 700년 사직의 수도라니 말이 되는가?
 
그렇다. 그의 느낌은 정확했다. 그의 느낌대로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왕도가 아니다. 일제는 고대 삼국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반도사관을 정착시키기 위해, 백제의 수도로 한성(서울) 웅진(공주) 사비(부여)로 조작하고, 논산을 황산벌이라 했고 금강을 백마강으로 조작해 버렸다.

그리고 노랫말로 허구의 삼천궁녀와 낙화암이라는 전설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백제 부흥운동의 주역인 흑치상지가 활동했던 임존성(任存城), 주류성(周留城)도 한반도 안에 있었다고 조작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반도사관의 이론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전해져, 백제가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 신라는 경상도 일대에 있었다고 사학계는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생겨난 엉터리 사학이론이 정치인들에게 이용되어 전라도 백제, 경상도 신라로 나뉘어 대립을 하는 지역주의로까지 발전한다. 그런 지역주의가 얼마나 허황되고 창피스럽고 무지한 것인지 사서의 기록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백제가 산동성에 있었다는 증거

현 국사책에 나오는 백제의 줄거리는 백제는 B.C 18년 온조대왕이 하남 위례성(서울)에 개국했고, 전성기인 13대 근초고왕 때 마한을 병합하고 대륙에 진출해 요서/진평에 무역기지를 두었으며, 21대 개로왕 때 한강변에 제방을 쌓았으며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자, 아들 문주왕이 웅진(공주)로 천도하고, 26대 성왕 때 사비(부여)로 천도했다가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망했다고 되어 있다.

물론 교과서 내용은 사실(史實)과 많이 다르다. 백제의 본거지는 대륙의 산동성이고, 패망도 역시 산동성에서 했다. 백제가 대륙에 있었던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핵심은 한반도에 있던 백제가 잠시 대륙으로 진출한건지, 아니면 백제는 아예 대륙에 있었는지가 논쟁의 관건이다. 우선 아래는 백제의 수도가 한반도에 없었다는 증거들이다. 

(1)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진출하였다는 기록이 없는데, 이상하게 백제의 역사기록은 대륙이다. 

(2) 북위와 5차례 큰 전쟁을 한 백제 동성대왕의 무대는 대륙이고, 동성대왕의 궁전인 임류각은 산동성에 있었고 거기서 죽었다.

(3) 당나라가 한반도백제를 멸하려면 중국 땅에서 대륙백제와 먼저 전쟁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이 없고, 황해를 건너왔다면 당나라와 해상강국 백제와의 해전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없다.

(5)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일식기록을 분석한 결과 최적관측지가 발해만으로 나온다.

(6) 만약 한반도 백제가 본토라면, 본토의 20배 크기의 땅을 수백 년간 다스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7) 인구의 역사로 보아도 백제의 수도는 산동성 일대에 있어야 합리적이다.

(8) 백제의 8대 성씨가 반도에는 없고 대륙에 있다.

(9) 그 외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증거가 많다. (향도,조공,제방,기상,특산물, ...) 


▲  서울대 박창범교수가 삼국사기, 일본서기, 고려사의 일식기록을 분석한 도표. 이 과학적 근거를 반박할 사학자들은 나와보라. 백제의 최적관측지는 분명 발해만 근처 북경지역이다. 북경지역은 백제의 개기일식을 가장 확실히 볼 수 있는 곳이다. 상대신라는 201년 이전, 하대신라는 787년 이후, 왜는 628~709년 이다. 
 
나중에 하나하나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지금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이 한반도에 있었는지 대륙에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부여박물관에 가면 부여에서 발견된 비문 탁본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분명 내지성(奈祗城)으로 되어 있다. 이 탁본만 봐도 부여는 사비성이 아니라 내지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부여 백제박물관에 전시된 내저성 비문. 부여는 사비성이 아니다.

경기도 시흥시는 관내의 소래(蘇來)포구를 소정방이 왔기 때문에 소래포구라 한다고 시민들에게 자랑스럽게 홍보하고 있다. 제주도 정방폭포의 이름은 소정방이 제주도에 온 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 정방폭포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또 부여를 흐르는 강이 백마강으로 불리게 된 것은 당나라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호국의 용이 된 무왕을 낚았다는 엉터리 같은 전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소정방이 백말을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바위가 백마강에 조룡대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있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다.

참으로 엄청난 무지의 소치라 아니할 수 없다.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의 약발이 아직까지 듣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소정방은 한반도에 온 적이 없다. 왜냐하면 백제가 한반도에 없었기 때문이다. 소정방이 왔다는 것은 백제 패망지이므로 소정방의 위치를 추적해 보면 백제의 위치를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여의 옆을 휘감아 도는 강 이름을 백마강이라 하나, <삼국사기>와 <신.구 당서> 등 모든 역사기록에는 "백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서>에 보면 소정방은 백제패망 전에도 백강에서 낚시를 가끔 했다고 적혀있다. 그럼 소정방은 한반도 백마강까지 바다건너 낚시하러 왔단 말인가? 이 이야기는 백강이 당나라의 영역이든가 국경선이었고, 백제와 당나라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   이어지는 백제에 대한 기사를 보시려면 이 지도를 참조하시면 이해가 빠르다.

최후를 맞는 백제의 수도는 어디?

아래는 <삼국사기 신라국본기> 기록에 의한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은 무왕의 아들인 31대 의자왕이다. 의자왕은 대외적으로는 영토를 많이 넓히고 대내적으로 정치를 잘해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의자왕이 술과 여자에 빠져 정치를 게을리하고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을 가까이 두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기록된 것은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만일 백제가 천하통일을 했다면 의자왕은 아마 명군으로 기록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의자왕은 고구려와 합세하여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빼앗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김춘추의 딸과 사위의 머리를 베어 수도로 보낸다. 사학계는 대야성을 합천으로 비정했다. 과연 그럴까? 여하튼 국가가 총체적인 위기로 몰리고 자체적으로 딸과 사위의 복수를 하려 했으나 군사력이 없던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 연개소문을 찾아 갔으나 거절당하자 당나라에 들어가 원병을 요청한다.>

여기서 이상한 기록이 있다. 백제가 당항성을 빼앗자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가 끊겼다는 기록이다. 현 역사이론이라면 육지에 있는 당항성과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신라는 바닷길이 당나라와의 통로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육지에 있는 당항성을 잃자 통로가 끊겨졌을까? 즉 이 이야기는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에 있지 않고 당나라와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인 것이다. 

▲   백제가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은 것을 그린 지도. 백제 멸망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신라는 진덕왕 때부터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고, 자체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쓰는 속국이 된다. 국가의 위기도 하나의 이유지만 개인적으로 딸의 복수를 위한 적개심 때문에 외세를 끌어들이고 스스로 속국임을 자청한 신라의 모습을 보면 이성계의 조선이 명나라의 힘을 빌기 위해 스스로 속국이 된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나라는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신라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임명하여 13만 대군을 동원한다. 이 때 신라왕이 된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지원케 한다. 보통 군을 동원하여 직책을 내릴 때 정벌할 지방의 명을 따는 것이 상례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이세적장군에게 내린 직책이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이다. 요동은 하북성에 있는 고구려를 의미한다.

백제를 정벌하는 김춘추의 직책인 우이(嵎夷)는 바로 산동성을 의미한다. 즉 당나라는 산동성에 있는 백제를 정벌하러 간 것이다. 자고로 중국의 고지도에는 북경 이동과 한반도의 지도와 지명이 없다. 송나라 때 만든 지도인 우적도에도 만주와 한반도는 아예 안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만일 당나라가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정벌하러 갔다면 지명부터 새로 만들었을 것이다. 

▲  백제의 중심 지역.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한강변이 아니라 황화변이다. 숭산은 하남성 소림사가 있는 지역이다. 거기까지가 백제의 영토였다는 이야기이다.  초록색 사각형 아래 항성(項城)이 바로 당항성이다. 백제의 패망지는 바로 이 지도의 산동성 안에 있다. 평원, 황산, 백마하,  사성과 비성(사비성), 부흥운동의 중심지 주류성, 석문(석가장)은 신라와 당나라가 싸우던 곳이다. 최치원전에 나오는 연, 노, 제가 이지역이다.  산동성 아래가 海지방이다.  백제의 수도로 들어가면서 이곳을 지나간 것을 두고 바다를 건넜다는 표현을 쓰기도 해 마치 황해바다를 건넌 것처럼 오인하기도 한다.

여름 5월 무열왕이 김유신을 대동하고 군대를 이끌고 서울을 떠나 6월에 남천정에 주둔하였고, 당나라는 협주를 떠나 전선을 거느리고 동(백제)을 향하여 물길을 따라 내려왔다. 무열왕이 병선 100척과 함께 태자를 보내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영접하게 하였다. 이 덕물도를 사학계에서는 한반도의 옹진 앞바다 덕적도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이 때 소정방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당도하여 군사와 회합하여 의자왕의 도성을 무너뜨리려 하오.”하니 태자가 말하기를 “우리 대왕이 지금 대군을 고대하고 계시는 터이라 만약 대장군이 오셨다는 말을 들으시면 반드시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오시리라”하였다.

여기서 이 장면은 분명 대륙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무열왕이 5월에 수도를 떠나 6월에 남천정에 주둔했다고 기록했는데, 한반도라면 경상도 경주에서 출발하여 백제 국경까지 가는데 한달씩이나 걸릴 정도로 그렇게 넓었는지? (5월말에 떠나 6월초에 도착했다고 억지를 부릴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되는 상황을 보라)

당나라가 출발하는 같은 달에 이미 무열왕이 군대를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고 태자를 보내 덕물도에서 영접케 한 것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분명 당나라는 물길을 타고 동으로 내려왔고, 내려오니 신라 태자가 기다렸다고 기록하였다.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은 물론 없다.

또 소정방은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도착한다고 말했다. 무열왕이 5월에 먼저 출발했으니 무열왕의 금성 출발은 소정방의 백제 도착 최단40일 ~ 최장70일 전이다. 한반도 경주에서 백제까지는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40~70일이나 신라가 왕이 직접 나서서 군사행동을 먼저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건 분명 대륙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  교과서에 나와있는 백제 패망 지도. 이것을  아직까지 믿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이다. 사학계의 잘못이 너무도 크다.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도 없고, 백제는 22개 담로를 건설한 해양제국이었는데 당나라가 황해를 건너려면 백제와 해전을 해야 하는데 그런 기록도 없다. 해양강국 백제의 앞 바다에 신라 배 100척이 나타나 소정방을 영접했는데도 아무런 저항을 안 받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신라 태자가 배 100척을 거느리고 영접한 곳인 덕물도는 한반도의 덕적도가 아니라 바로 대륙 어딘가에 있는 지명으로 보는 것이다. 

당나라가 한반도백제로 떠나기 전에 산동백제와 전투한 기록도 없다. 그럼 그 때 산동성엔 대륙백제가 없었을까? 160년 전인 동성대왕 시대에도 대륙의 동부 평야지대를 전부 차지한 백제였는데, 그 사이에 대륙백제는 명맥이 끊어졌을까?

백제는 대륙에 없었고 한반도 서부에만 있었다고 보는 것이 식민사학계의 이론이다. 대륙 산동성에 백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7월 김유신이 황산의 평야로 나가 백제의 계백장군과 전투를 벌여 4번을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관창의 희생으로 사기충천한 신라는 백제군을 격파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같은 날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해 백제군과 싸워 이겼다는 기록이다. 한반도 덕적도에 6월에 도착한 소정방이 왜 이리도 늦게 기벌포에 도착한 것일까? 기벌포까지 최단 10일 ~ 최장 40일 걸렸다.

위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5월 무열왕의 출발에서부터 6월 소정방과 신라태자가 만나고 7월 10일 경 소정방이 기벌포에 오기까지는 최단 40일 ~ 최장 70일 걸렸다. 소정방이 6월말에 덕적도에 도착했다면 기벌포까지는 최소 10일 이상 걸린 것이고, 그렇다면 5월말에 무열왕이 금성을 떠났으면 최단 30일간 ~  5월 초면 최장 60일간 신라의 무열왕은 어디에서 뭘 했단 말인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이다. 5월말에 무열왕이 떠나고 소정방이 6월 초에 덕물도에 도착했으면, 이 건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덕물도에 도착한 소정방이 기벌포에 나타나는 7월 10일까지 40일간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덕물도와 기벌포는 같은 한반도라면 한반도 내에서 소정방이 이동하는데 40일이 걸렸단 말인가? 한반도 백제가 그렇게 큰가?

여하튼 무열왕 출발에서부터 기벌포에 소정방이 나타나기까지 40일 ~ 70일 걸렸다는 것은 땅덩어리가 큰 곳에서 벌어진 상황이지 좁은 한반도에서는 상식적으로 날자 계산이 맞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대륙이 아니면 잘 설명이 안 되는 싱황인 것이다. 이 날자 계산에는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
 

사학계에서는 당나라가 중국에서 떠나 한반도까지 오려면 그 정도는 걸린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렇다면 뭐 하러 무열왕이 김유신과 함께 5월에 소정방을 맞으러 먼저 출발한단 말인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3~4일이면 경주에서 백제 국경까지 가고도 남음이 있는데 40~70일 전에 움직인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하려는가?

기록과 같이 무열왕과 김유신이 소정방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도착 후 모든 작전계획이 실행된 것을 보면, 무열왕과 김유신과 소정방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그런 스토리가 엮이지 않는다. 다들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록이 남은 것이다.

▲ 백마하, 주류성, 해, 사수는 사성이 있는 곳, 황산은 계백장군이 패한 곳, 래는 동성대왕 시절 임류각이 있던 곳, 동평은 치우천자의 능이 있는 곳, 서화는 기자가 살던 곳, 바로 이 산동성에 백제가 있었다. 패망시 지명이 여기 다 들어있다.

현 국사책의 이론은 당나라는 서쪽 바다 건너고,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이고, 신라는 동남부이다. 기록에는 당나라가 신라를 먼저 만난 후 백제로 간다. 그렇다면 소정방의 배가 신라바다까지 가야 하는데 백제 앞바다를 거쳐야 하므로, 당연히 신라가 황해바다 어딘가에서 영접을 했을 것이다. 

현재 사학계는 신라태자가 덕적도(옹진 앞바다)로 영접을 갔다 하는데, 거긴 백제 또는 고구려 지역으로 해상강국 백제와 고구려 수군이 신라 배 100척을 가만 놔둘 리가 없고, 또 해전이 벌어졌다면 태자와 소정방이 참전한 해전이므로 당연히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해전 기록이 그 어디에도 없다. 고구려/백제는 수군이 전혀 없었단 말인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이 상황은 대륙에서 발생한 전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신라는 당연히 당나라가 도착한 것을 확인한 후 백제와 전투를 시작한다. 첫 전투가 황산전투라고 치고 다음의 상황을 보자. 김유신과 계백의 5번의 전투가 얼마나 소요되었는지 몰라도 최소한 10일 이상이다. (하루 전투해 져서 다음날 재정비해서 그 다음날 또 도전했다 하더라도 최소 10일은 걸린다.)

덕적도와 기벌포가 같은 한반도 내에 있었으면 이렇게 늦게 소정방이 도착할 리가 없다. 덕적도에서 신라 태자를 만난 후 출발한 소정방의 첫 전투지인 기벌포까지 그렇게 오래 (최단 10일 ~ 최장 40일) 걸린 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라고 봐야 한다.

이후 7월 13일 의자왕이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나고, 18일 드디어 웅진성에서 나와 의자왕이 항복한다. 해양대제국 백제의 31대 700년 사직이 쓰러지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의자왕은 온갖 수모를 당하고, 9월 3일 소정방은 백성 12,000명과 함께 의자왕을 끌고 사비성으로부터 배를 타고 당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국가가 썩어서 망한 것이 아니라, 잘 나가다가 적의 기습을 예측 못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단 몇 번의 전투에 패해 수도가 무너지고 왕이 항복해 급격히 패망한 것이다. 즉 국가 실력으로 볼 때 패망할 정도가 아니었는데 공교롭게도 상대 특공대의 기습 공격에 카운타 펀치를 급소에 정통으로 맞아 한방에 K.O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건 흑치상지가 벌인 부흥운동이 잘 대변해주고 있다. 다음 연재를 기대해 주세요. 

▲  백제 부흥 운동의 주인공 흑치상지의 고향은 중국 대륙 남단. 여기까지 백제가 있었단 이야기이다. 고향이 이곳인 흑치상지가 한반도에가서 백제의 부흥운동을 했다는 사람은 정신병자로 봐야 한다. 당나라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40만 대군을 파병한다. 그 40만 대군이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한반도에 왔다는 걸 믿는 사람은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다.  (다음 회에 자세히 소개됩니다)
 
<2부에서는 “백제의 기록으로 본 백제의 최후”와 “소정방은 황해를 건너 백제를 멸했나?”가 연재됩니다. 또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북브레이크뉴스 송기옥(향토사학자) 칼럼니스트가 지난 4월 22일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의 최후"의 제목으로 쓴  칼럼기사와 함께 싣게 되었습니다. 현재 브레이크뉴스 관계자는 본지 성 훈 칼럼니스트와 송기옥 칼럼니스트와의 공개적인 토론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두 칼럼기사를 함께 실었음을 독자 제위께 알려 드립니다. 이를 위해 빠른 기간에 두 칼럼니스트를 통해 서로의 주장을 실을 예정에 있습니다. 편집자 주>

진실 08/04/30 [18:32] 수정 삭제  
  무령왕릉이 너무 적고 부부합장릉이라 하길래 백제왕들이 너무 검소한것 아닌가 생각했는데...인천에서 중국 가보신분들은 알겠지만 쾌속선으로 달릴때 배 뒷편에 서있으면 바람에 날라갈지도 모르고...물살이 얼마나 급한지...시간도 반나절 이상 걸리지요...그런데 그 많은 군사가 어찌왔을까 궁금했는데...이땅의 역사학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건지...나제통문도 일본인들이 만든 가짜라던데...이게다 식민사학의 영향인가요...일식기록보니 더 할말이 없군요...자식에게 뭐라고 설명을 해야하지...아버지를 이상하게 생각할텐데...나참...기사 잘보았습니다. 다음기사가 기다려 집니다. 어씨~ 속이다 시원하네
백제사 문제 08/04/30 [21:53] 수정 삭제  
  백제 최후 수도문제 논쟁과 관련하여 운을 떼는 내용하나 올리죠...

무녕왕릉의 지석문에 나오는 '사마'을 무녕왕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무녕왕을 동성왕의 아들로 착각하고 있는 성훈님에 대한 무지를 위해서......공주에서 발굴된 무녕왕릉에는 [사마]라는 무녕왕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천자나 황제가 승하할 때나 사용하는 [붕어]라는 한자가 명확히 표기되어 있지요. 일종의 제후국의 왕 따위가 사용할 수 없는 표기라는 것은 성훈님도 잘 아실터이고.. 신라사관으로 왜곡한 삼국사기와 백제사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일본서기의 내용를 비교분석해 보고 공주 무녕왕릉의 지석에 표기된 '사마'가 개로왕의 적자임을 인정하면 공주.부여를 백제의 수도로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며, 부정한다면 출토된 유물도 부정하는 어거지 역사연구가 아닌가 싶군요...그리고 한반도에 왜 백제는 없고 다 신라입니까? ㅎ..신라의 영역은 [만주원류고]에 나오는 기록내용으로 개원.철령은 나당연맹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영역임을 유의하시기를..

백제 수도문제와도 관련되는 사촌형제간인 무녕왕(사마).동성왕의 출생비밀과 관련한 아래 글을 참조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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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25대왕인 무녕왕은 휘가 사마로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있다. 그는 신장이 8척이나 되며, 미목이 그림과 같고 인자관후하여 백성이 순종하였는데, 동성왕이 재위 23년에 좌평 백가의 모반으로 시해 당하시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무녕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것으로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일본서기와 이 책에 인용된 백제신찬이라는 사서에는 이와는 다른 이야기가 쓰여있다. 일본서기 무열왕 4년 4월조에 "이 해에 백제의 동성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악한 짓을 하자 나라사람들이 죽이고 시마왕을 세웠는데 이가 무녕왕이다"라고 하면서 백제의 역사서인 백제신찬의 기록을 옮겨놓고 있습니다.

백제신찬에는 "동성왕이 무도하여 포악한 짓을 하자 나라 사람들이 제거하고 무녕왕을 세웠다. 휘는 사마왕인데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즉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다. 곤지가 왜로 향할 때 축자도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 그래서 이름을 '사마'로 지었는데, 지금도 각라 가운데의 섬을 '사마'로 부른다"라고 하면서도 탄생의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 생각하니 시마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동성왕은 곤지의 아들이다. 이를 배다른 형이라 하는데 잘 모르겠다"라고 하면서 의혹의 기사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무녕왕이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건지, 아니면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라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이 일본서기 웅략왕 5년 4월조에 이와 관련된 또 다른 기사가 있어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즉,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 침략의 어려움에 처하자 일본에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아우인 곤지를 일본에 파견하게 됩니다. 이 때의 사실이 일본서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개로왕이 곤지에게 사신파견을 명하자 곤지는 "상군의 명에 어긋날 수는 없습니다. 원컨대 군의 부인을 주시고, 그런후에 나를 보내 주십시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개로왕은 임신한 부인을 곤지에게 장가들여 "내 임신한 부인은 이미 산월이 되었다. 만일 도중에 출산하면, 부디 같은 배에 태워서 어디에 있든지 속히 나라로 돌려보내도록 하여라"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곤지가 일본으로 출발하였는데, 두 달 후인 6월에 이르러 개로왕의 말대로 축자의 각라도에서 출산하였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사마왕'이라하였다. 그래서 곤지는 배 한척을 마련하여 사마왕을 그 어머니와 같이 백제로 귀국시켰다. 한국학계에서는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이러한 기사에 의심을 품고 무시해왔다. 그것은 [일본서기]가 근본적으로 한일관계를 일왕중심으로 사실을 왜곡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71년에 발굴된 공주 무녕왕릉에서 지석이 나왔는데, 거기에 백제 무녕왕의 이름은 '사마'이며, 523년 5월 7일에 62세로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망년도를 역산하면 출생년도가 되는데, 왕이 62세로 사망했다고 했으므로 왕이 출생한 해는 461년이 됩니다. 이는 일본서기의 백제신찬에 곤지가 일본으로 파견된 신축년 즉 461년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백제신찬의 기록을 신용한다면, 무녕왕의 아버지는 삼국사기에서 말한 동성왕이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게다가 개로왕의 아우인 곤지도 단지 의부일뿐 무녕왕의 생부는 역시 개로왕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무녕왕의 아버지가 동성왕이냐, 곤지냐, 개로왕이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면 삼국사기에서는 왜 무녕왕의 아버지를 동성왕의 둘째아들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의 역사관에서 찾아야 될 것 갔습니다. 김부식은 철저한 유교 학자로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유교적 윤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해서 이를 은폐하기 위해 엉뚱하게도 동성왕을 끌어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일제가 왜곡했으면 두 내용 다 동일하게 왜곡시키지 판이하게 차이가 날 리가 없겠지요? 문헌내용과 고고학적 근거가 명확히 맞아 떨어지는 무녕왕릉의 지석문은 공주에서 출토되었으니 백제의 웅진시대가 맞죠..부정할 거유?
이분법의 폐해 08/04/30 [22:29] 수정 삭제  
  대륙과 한반도를 분리시켜 보는 역사연구시각도 역시 마찬가지라 보고 싶군요..우주는 텅빈듯 해도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죠..과거와 현재와 미래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죠..중국과 한반도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죠..그리고 본래 중국과 한반도는 하나의 육지로 연결되었다가 해빙기가 되어 바다수면이 높아지면서 중간지역이 서해바다가 됨으로써 떨어지게 되었죠..그렇다고 사람들의 이동이나 문화의 교류가 단절된 건 아니죠..끊임없이 육지와 바다를 통하여 이어졌죠....중국과 관련한 백제사도 유기체적인 관점으로 보면 중국에 한정하는 대륙사관과 한반도에만 한정하는 반도사관의 문제와 한계가 극복되리라 보고 싶군요...^^
조재범 08/04/30 [23:41] 수정 삭제  
  백제사 문제님 도대체 무령왕릉의 지석의 사마는 제대로 읽어보고 하십니까? 무령왕릉의 지석 사마(斯麻)는 무령왕의 휘 사마(斯摩)와는 다른 글자입니다. 또한 임금의 죽음은 붕어로만 쓰지는 않습니다. 보통 임금의 죽음은 훙(薨)으로 쓰지요. 일본서기요? 그거 그리 믿을것 못 됩니다. 또, 웅진의 동쪽엔 대산이 있다고 구당서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공주 동쪽에 대산이란 산이 있습디까? 난 공주 지금까지 3번 답사했는데요. 공주 주변에 계룡산은 있어도 대산은 없습니다. 그 대산은 지금 중국의 명산인 태산입니다. 실제 태산은 대산이라고 불렸던 적이 있으니까 딱 들어맞지요. 그리고 웅진이 도읍지였던 기간은 겨우 63년인데 공주의 유적지는 겨우 60년 남짓한 도읍지 치고는 유적지가 너무 많습니다. 이는 그 지역이 장기간 도읍지를 했다는 것이죠. 신구당서에 백제 왕 거소는 동서 2곳이라니까 공주는 백제 분봉왕의 도읍지올시다. 즉, 전라도 충청도 일대엔 백제의 일시 진출지였지 건국지, 패망지가 아니올시다. 이는 백제 8대 성씨가 한국에는 국,진,연 3개만 있는데 중국엔 8개가 온전히 있는 것도 확증이지요. 다시 무령왕릉을 말하자면 왕릉의 지석엔 왕의 업적, 즉위 연대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상례올시다. 그런데 그런 것은 전혀 없소. 또, 왕릉이 있으면 꽤 거리를 두고 다른 무덤을 만드는 것이 상례인데 무령왕릉은 반경 20m에 무덤이 2개 있소. 이는 백제 분봉왕 사마왕릉이지, 무령왕릉이 아니오. 또 삼국사기엔 무령왕의 장지가 언급되어 있지 않소이다.
백제사 문제 08/05/01 [02:04] 수정 삭제  
  '사마'가 둘인가 보죠?ㅎ 님이 올린 사마라는 한자어가 거의 같은데, 뭘 그리 부정하려는 겁니까? 한국인들에게 한자어란 '음을 빌리는데 비중을 두는 문자죠. 그리고 일본서기 믿을게 못 된다구요? 어찌 님들은 불리하면 믿을게 못된다는 논리를 펴시요? 일본서기는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왕족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고 백제사를 '일본열도'중심으로 바꾼 역사서요..부정 못하겠지요? 즉, 백제사의 비밀이 담겨있는 책이 일본서기라는 말이요. 일본서기는 정확히 동성왕과 무녕왕이 사촌지간임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즉 개로왕의 적자 무녕왕이 40세에 왕위에 오르고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둘째 아들 동성왕이 38여세에 암살당했으니 정확히 맞아 떨어지고 무녕왕이 62세로 사망했다고 지석문에 기록되어 있으니 곤지가 무녕왕(사마)을 임신한 개로왕의 왕비를 데리고 일본열도로 피신하다가 섬에서 무녕왕을 낳은 461년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이거요..땅속에서 토해내는 유물들과 문헌내용도 자신들 논리에 안 맞으면 부정하는 자들이 무슨 역사연구를 한다는 거요..성훈씨는 무녕왕이 동성왕의 아들이라더군요..ㅎ..40세에 왕위에 오른 무녕왕과 15세에 왕위에 올라 22년간 재위(재위 479~501년)하다 37세에 백가에게 암살당한 동성왕..두 왕들간에 나이 차이가 어찌 되나요? 그럼 동성왕이 2-3살에 무녕왕을 낳았다는 거요? 코메디 그만 하시요. 댁들 때문에 고대사 연구에 혼란만 주는 것이요.. 지명 몇 개 가지고 갖다 붙이는 그런 연구는 초딩들도 하는 거요. 문헌들과 유적유물들과 잘 조합을 잘 시켜서 제대로 연구들을 하시요. 그리고 '붕어'는 천자나 황제사망시에만 붙이는 표기라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이요? 제후가 사망해도 '붕어'라는 표기를 했다는 거요? 댁기~ㅎ 님들은 그런식으로 역사연구하시나 봐요?


< 분 석 >


1. 출생, 즉위, 사망 관계에 대한 기록

① 삼국사기 백제본기

- 익왈 무영왕 휘 사마(謚曰 武寧王 諱 斯摩)
- 출생 기록없음
- 즉위 501년
- 523년 계묘(癸卯) 5월 왕이 붕(崩)

② 지석(誌石)
- 칭호 사마왕(斯麻王)
- 출생 462년
- 즉위모름
- 523년 계묘(癸卯) 5월 7일 왕이 붕(62세)

사망년월이 같다는 거은 같은 인물로 볼 수 있는 기록이다.
'사마'는 신라출신 김부식이 음을 빌어 쓴다고 이두문자로 사용했다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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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의 휘 소개

전지왕(405-420)--------휘 映
개로왕(455-475)--------휘 慶司
문주왕---------------없음
삼근왕---------------없음
동성왕(479-501)-------휘 모대(마모)
무령왕(武寧王)(501-523)-휘 사마(斯摩)
성왕(523-554)---------휘 명농
위덕(554-598)---------휘 창(昌)
혜왕(598-599)---------휘 계명
법왕(599-600)---------휘 선
무왕(600-641)---------휘 장
의자왕---------------없음

휘가 '창'인 백제 위덕왕의 사리함이 '백제왕 창'이라는 명확한 표기와 함께
1300여년간 잠들어 있다가 부여에서 녹슨 채 출토되었다. 여기서도 백제 수도는 부여임이 입증되고 있다. 또한 '백제왕 창'은 아버지 성왕이 신라군에게 무참히 전사한 후에 그 죄책감과 슬픔을 잊지 못하여 승려가 되겠다고 하자, 신하들이 막았다는 [일본서기]내용이 나오는데, 백제 창의 사리함에 표기된 내용을 통하여 [일본서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또한 입증했다. [왜]을 오로지 중국 남부지역으로 설정하고서 짝맞추기를 못하고 있는 자들이 한심스럽다고 할 수 있다. [한단고기-마한세기/고구려 본기]에도 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로지 땅덩이를 어찌하면 크게 넓혀볼까 하여 안달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할 것이다.신라우위의 신라사관이라면 이 또한 반도사관에 버금가는 역사왜곡이라 할 것이다!
성훈 08/05/01 [09:41] 수정 삭제  
  나중에 이런 제목의 글이 올라올 겁니다. 그 때 논란하기로 합시다.
분명한 것은 백제와 왜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백제는 산동성 일대 왜는 남지나 해상입니다. 따라서 무녕왕의 출생지도 일본이 아닙니다. (참고로 남지나의 해류는 일본으로 흐릅니다 즉 대만에서 뗏목타고 가만히 있어도 일본열도에 도착합니다. 우리 삼국시대의 왜는 분명 남지나 해상에 있었습니다.
이것을 반박하려면 박창범교수의 일식분석이라는 과학이 거짓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가능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 억지 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삼국사기의 일식실현율은 80%가 넘습니다. 일본서기의 일식실현율은 30% 대입니다. 어느 것이 정밀한 사서입니까? 그런데 님은 그런 일본서기가 맞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일본서기는 본인이 본인의 아버지와 아들이 되는 이상한 기록이 많습니다. 신공왕후도 120년이나 당겨져 있고...(일본인은 역사 컴플렉스를 만회하기 위해 사서를 조작한 자들입니다) 일본서기는 객관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사서인 삼국사기가 엄연히 있는데 외국의 사서(일본서기)가 맞다고 우기는 분들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곤랍합니다. 해서 답글도 안합니다. 일본인이 위장해서 들어와 글을 쓴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먼저 자기 신분을 밝혀여 할겁니다.

보니 사학물을 꽤 드신 분 같은데 무녕왕릉보다는 제 기사에 대한 반박을 해보시죠. 주제와 핀트가 벗어난 댓글은 인정받기가 어렵습니다. 잘못하면 시비거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라디오 08/05/01 [10:36] 수정 삭제  
  무녕왕릉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대륙 백제설의 일부를 인정합니다. 부정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자꾸만 대륙백제만 강요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항상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해야 해요.
일본서기도 개별 기사는 신뢰성이 높은 기사가 많습니다.
뭉뚱거려 부정하는건 어리석습니다.
라디오 08/05/01 [10:57] 수정 삭제  
  박창범님의 일식 기사같은 건 자동으로 신뢰성이 떨어집니다.

우로 기사같은 경우도 삼국사기에선 첨해 3년= 249년이라 나와 있지만..
남당의 미추기에 의하면 우로가 사망한 해는 미추 7년=331년 입니다.
일본서기 신공황후 자체기년=200년 이니까...

331년- 200년= 131년 편차.

자동으로 120년 2갑자 인하설에 타겟 범위안에 들어 옵니다.
300년중반이라 하면 신공 or 응신의 시대입니다.
성훈 칼럼리스트 08/05/01 [11:40] 수정 삭제  
  전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지 민족주의 때문에 거짓으로 역사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연관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과학을 부정하는 사람과 무슨 대화가 통하겠습니까?

무령왕이 일본 열도에서 태어났을 확율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왜가 거기 없었기 때문입니다. (박교수의 일본서기 일식기록분석에 왜는 남지나 해상)

그리고 사마는 무령왕의 휘 즉 이름인데 왕의 능을 만들면서 묘호를 안 붙이고 이름을 쓰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정조의 능을 만들면서 "이산지묘"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보세요.

그리고 사마의 마자가 기록과 다릅니다. 이런 점은 참조도 안 하면서 일본 사학자들이 그거 무령왕능이라고 해라 하니 그대로 따르는 것이 이나라 사학계입니다.

본 기사와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기에 간단히만 설명했습니다.
답답한 성훈님 08/05/01 [15:06] 수정 삭제  
  공주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지석문도 부정하고 개로왕의 친아들인 무녕왕이 2-3살 나이가 차이가 나는 동성왕(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둘째아들)의 아들이라는 소리나 해대고 있는 성훈님..왜를 중국 남부지역에 때려 맞추고서 짜집기할려니까 잔머리만 굴리는 거 아닙니까? 일본열도의 고대 유적지들은 그럼 일제가 조작하기위해 다 조성하고 매장한 거라고 보시요? 백제본국은 한반도지역(수도:서울=>공주=>부여)이고, 중국 요서.동남부 지역은 이미 동성왕 훨씬 이전 시대인 근초고왕.근구수왕때 진출하여 점령한 후에 총독파견하여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가 안정적으로 터를 잡고 중국에서 군사적 대응을 충분히 하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요. 지명이야 비슷한 거 여기저기 많고 한반도(중국) 사람들이 중국(한반도)으로 이동해서 정착한 지역에 갖다 붙이면 동일한 지명이 2개 나올 수 있는 것이요..그래서 소정방이가 중국에 있는 백강에서 낚시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의자왕과 의자왕의 아들 무덤이 중국대륙에 있는 건 백제본국이 멸망한 후에 중국으로 끌려가 살다가 묻힌 거라 보면 될 거요.그리고 중국의 백제영토들은 산동.요서의 경우 고구려와 신흥세력 북주의 공격,그리고 중국 동남부 지역은 중국 남쪽의 '남진'의 공격으로 멸망하여 모두 소멸된 것이고(중국 '통전'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죠-"백제 잔류민들이 돌궐족이나 말갈족으로 투항해 흩어졌으며,부여슝과 백제의 군장들은 옛 영토로 돌아갈 수 없어서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 한반도 본국마저 왜국(일본=백제 분국)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으로 결국 멸망하게 되는 것이요..그래서 '백제사'의 기록이 일본중심으로 수정편집해 놓은 [일본서기]이며, '일본'은 백제왕족들이 멸망 후에 구다라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운 백제나라요..신라와 백제와의 고대 비극적 관계에서 비롯된 역사적 배경이라 할 것이요. 또한 한일관계와 관련하여 거시적으로 보지 않고 국가적 차원으로만 보게 되면 한일관계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없다 보고 싶군요. 사죄와 배상을 전제로 화해협력관계로 나가야 아시아 평화에도 이바지하는 길이 될 것이라 보오. 자꾸 왜를 중국 남부지역으로 설정한 이상 객관적 고대사 인식은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대마도 서북경계인 임나가 북으로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었는데, 국미성이라 한다.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 되었다...임나가 또 갈려서 삼가라가 되었다..소위, 가라(가야)란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이때부터 삼한은 서로 다투고 싸워 왔고 세월이 오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영락3년 마침내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의 통제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광개토태왕이후 고구려 제황들)가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다."[한단고기-고구려 본기]====>여기서 대마도(임나)는 중국 남부지역의 섬이 아니고 지금의 대마도요,그리고 또한 한반도 남부의 삼한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으니 명백하다 할 것이요.왜를 엉뚱한 곳에서 찾지 마시요.
조재범 08/05/01 [15:18] 수정 삭제  
  무령왕릉이 진짜 무령왕릉이라면 재위기간이 새겨져 있어야 하고 업적이 새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는 광개토태왕릉비가 증빙하죠. 그리고 사마왕릉의 사마를 이두식 표기로 생각하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왕의 이름을 그런식으로 할 리 있습니까? 또한 무령왕릉이 진짜 무령왕의 무덤이라면 고려 땅의 김부식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습니다. 삼국사기엔 무령왕의 장지가 언급되어 있지 않음을 거듭 밝힙니다. 최소한 역사서를 쓰려면 현장을 답사했겠죠? 귀족이라서 답사 안 한다? 이런 식은 논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무령왕릉이 진짜 무령왕릉이라면 주위에 문주왕의 무덤도 있어야 하고 삼근왕의 무덤도 있어야겠지만 그런 것 일절 없습니다. 이는 거듭 말하듯이 백제 총독인 사마왕의 무덤입니다. 백제의 임금이 황제란 사실은 동성왕이 사법명과 찬수류에게 왕 작위를 수여한 것으로 입증할 수 있습니다. 붕어란 것은 그냥 왕에게도 쓸 수 있습니다. 제후에겐 못 쓰더라도 왕에게는 쓸 수 있습니다. 천자나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서열이 황제>왕>제후라는 사실은 여러분들도 잘 아실테죠? 제후한테 붕어란 말은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왕 이상에선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훙은 쓸 수 없습니다. 보통 사서의 기록은 나라의 최고 통치자의 죽음은 훙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 사서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x년 x월에 무슨 황제가 훙했다라고 하지 붕어했다라곤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왜 자꾸 일본서기를 들먹이는지 알 수 없군요. 백제사 문제님의 논조로 보아서는 일본서기를 삼국사기보다 더 위하는 것 같군요. 왜의 위치는 중국 25사에서 말하기를 회계 인근 지역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회계는 지금의 절강성 지역입니다. 왜의 지명은 회계, 이주, 단주, 담이, 주애 등인데 이 지역은 모두 중국 남방 지역에 있어서 박창범 교수의 일식 기록 분석 결과와 일치합니다. 또 왜의 풍습이 몸에 문신을 새기고 주사를 바르는 것인데 이 풍습은 일본에는 없고 홍콩 지역엔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왜의 지명들은 회계를 빼고는 모두 홍콩 인근 지역입니다. 즉, 일본서기는 적어도 7세기 이전의 기록은 신빙할 것이 못 됩니다.
거듭 밝히듯이 한반도 일대는 백제의 일시 진출 지역이고 무령왕릉은 백제 총독 사마왕릉이란 사실을 알립니다. 자세한 것은 www.coo2.net에서 확인하십시오.
답답한 조재범님.. 08/05/01 [15:33] 수정 삭제  
  님 논리라면 백제황제 밑에 있는 총독이라는 자가 감히 황제가 사망시에만 사용하는 '붕어'라는 내용을 지석문에다 표기합니까? 능지처참당할 일 있습니까? 인정할 것은 인정하시요. 아래 내용보면 523년 계묘년 5월로..삼국사기내용하고 지석문내용하고 사망일자가 동일하오!!

< 분 석 >

1. 출생, 즉위, 사망 관계에 대한 기록

① 삼국사기 백제본기

- 익왈 무영왕 휘 사마(謚曰 武寧王 諱 斯摩)
- 출생 기록없음
- 즉위 501년
- 523년 계묘(癸卯) 5월 왕이 붕(崩)

② 지석(誌石)
- 칭호 사마왕(斯麻王)
- 출생 462년
- 즉위모름
- 523년 계묘(癸卯) 5월 7일 왕이 붕(62세)

사망년월이 같다는 거은 같은 인물로 볼 수 있는 기록이다.
'사마'는 신라출신 김부식이 음을 빌어 쓴다고 이두문자로 사용했다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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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의 휘 소개

전지왕(405-420)--------휘 映
개로왕(455-475)--------휘 慶司
문주왕---------------없음
삼근왕---------------없음
동성왕(479-501)-------휘 모대(마모)
무령왕(武寧王)(501-523)-휘 사마(斯摩)
성왕(523-554)---------휘 명농
위덕(554-598)---------휘 창(昌)
혜왕(598-599)---------휘 계명
법왕(599-600)---------휘 선
무왕(600-641)---------휘 장
의자왕---------------없음

휘가 '창'인 백제 위덕왕의 사리함이 '백제왕 창'이라는 명확한 표기와 함께
1300여년간 잠들어 있다가 부여에서 녹슨 채 출토되었다. 여기서도 백제 수도는 부여임이 입증되고 있다. 또한 '백제왕 창'은 아버지 성왕이 신라군에게 무참히 전사한 후에 그 죄책감과 슬픔을 잊지 못하여 승려가 되겠다고 하자, 신하들이 막았다는 [일본서기]내용이 나오는데, 백제 창의 사리함에 표기된 내용을 통하여 [일본서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또한 입증했다. [왜]을 오로지 중국 남부지역으로 설정하고서 짝맞추기를 못하고 있는 자들이 한심스럽다고 할 수 있다. [한단고기-마한세기/고구려 본기]에도 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로지 땅덩이를 어찌하면 크게 넓혀볼까 하여 안달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할 것이다.신라우위의 신라사관이라면 이 또한 반도사관에 버금가는 역사왜곡이라 할 것이다!
성훈 칼럼리스트 08/05/01 [18:18] 수정 삭제  
  일본열도에 있는 왜가 중국 사서에 자주 나타나고 외교 사절단 파견까지 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입니다. 상식적으로 자기네가 모르는 땅에 있는 왜에 대한 기록이 왜 중국 사서에 남아 있습니까?

이렇듯 중국 사서에 빈번하게 왜가 언급됨은 왜가 대륙에 붙어 있거나 아주 가까운 섬(예를 들면 대만)에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특히 왜에 대한 기록은 대륙남부로 나옵니다. 일본 열도에서 대륙 남부까지 배타고 직접 횡단하려면 해류가 강한 역류라 불가능합니다. 참고로 대만에서 일본가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래서 대만 근처의 왜가 나중에 일본열도로 흘러간 것으로 봅니다.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대군과 유인사가 이끄는 40만 대군(부흥운동 진압군)은 절대로 황해를 건너올 수 없습니다. 이 40만이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에서 일어난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 정신병자입니다. 흑치상지는 대륙남단 광서자치족 출신인데 뭐하러 한반도에 와서 백제 부흥운동을 합니까? 뭔 말같은 얘기를 해야 대화가 되지요.

박창범교수의 일본서기 일식분석은 누구도 부인 못하는 정확한 과학입니다. 그걸 인정 안한다면 역사를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과학은 인정 안하면서 자기 주장이 옳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억지입니다. 그리고 그 과학이 사서의 기록과 완전 일치합니다. 그런데도 그걸 믿지못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하고는 이야기가 안됩니다. 이쯤에서 논쟁을 그만 둡시다.

일본 사람은 왜가 일본열도에 있었다고 끝까지 우길 겁니다. 그래서 가짜 무령왕릉을 공주에 만든 것이고요.

우리 사서보다 남의 나라 사서인 일본서기를 더 신봉하는 것을 보니 일본인이 위장해서 들어온 것 같고, 아니면 식민사학의 맹목적인 추종자인 것 같습니다. 국적을 밝히던가 신분을 밝혀 보십시오. 난 실명으로 댓글달고 있습니다. 뒤에 숨어서 이름도 못 밝히면서 떠들면 비겁한 자입니다. 앞으로 나와 실명을 밝히고 정정당당히 이론대결을 합시다.
못하겠거나 자신 없으면 조용히 계십시오.
조재범 08/05/01 [21:02] 수정 삭제  
  그래 좋습니다. 당신네들 말 이해합니다. 그런데 사마왕릉 지석 어디에 그의 즉위연대가 있습디까? 저도 무령왕릉 지석 내 눈으로 직접 봤지만 즉위 연대는 없습니다. 게다가 고려 땅안에 있는 무령왕릉을 김부식이 모른다는 식으로 기록하지 않을 리 있습니까? 게다가 김부식은 잡지 지리 편에서 웅진은 고려 태조가 분주로 개칭한 곳이라 했지 공주로 개칭했다고 한 적 없습니다. 즉, 웅진=분주이지 웅진=공주가 아니란 말입니다. 게다가 왕릉이라면 시호를 올려야지 왜 이름을 아니 그것도 틀린 이름을 쓴단 말입니까? 그 왕릉이 진짜 무령왕릉으로 생각할 수야 있습니다. '신,구당서'에 백제 왕의 거소는 동서에 2곳이 있다고 했으니까 동쪽 거소인 한반도에서 무령왕이 죽었다고 생각할 수야 있죠. 그런데 그 곳이 진짜 수도는 아니란 말입니다. 무령왕릉의 실체는 백제 총독 사마왕릉일 것이란 것도 제 생각일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무령왕릉이 진짜 무령왕릉이라 믿는 것도 당신 생각입니다.
그리고 왜에 관한 것 이것이 사서에 나온 내용들입니다. 여기서 어디가 일본 열도에 왜가 있었다고 보이는지 따져보시죠.
(1) 삼국지 동이전

회계 주애 회계동치지동 담이(會稽 朱崖 會稽東治之東 憺耳)가 함께 있으며 이모두 대방(帶方)의 동남쪽에 있다.

(2) 후한서

회계동야지동 회계동야현 주애 이주 단주 봉래가 담이(會稽東冶之東 會稽東冶縣 朱崖 移住 亶洲 蓬萊가 憺耳)와 함께 기록되었다.

(3) 양 서

회계지동 주애와 함께 담이(會稽之東 朱崖와 함께 憺耳)가 기록되어 있고 대방지왜(帶方至倭)가 기록하고 있다.

(4) 북 사

회계동여담이(會稽東與憺耳)의 기록이 있고 이주(移住)의 기록이 있는데
낙랑대방 에서 떨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5) 남 사

주애(朱崖)와 함께 담이(憺耳)가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담이란 곳은 노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 일본 열도에서 노자가 태어났다하면 믿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또한 왜에 관한 삼국지의 기록을 또 대자면 "이곳 왜는 땅이 몹시 따뜻해서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싱싱한 나물을 먹을 수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일본 열도가 열대지방입니까? 이런 기록이 남게.
또한 중국 지도 중에 우적도란 지도가 있습니다. 이 지도는 송나라 때 발간된 것인데요. 이 지도엔 중국 옆의 대만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는 송나라 때에도 해외 지식이 결핍되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대만도 몰랐던 중국인이 어떻게 일본 열도를 알고 정확하게 기록하겠습니까?
위 기록 중 회계는 절강성, 담이는 광동성 남월과 주애는 해남도 부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왜 항목에 등장한 이 지명들이 모두 중국 남방인데 이래도 억지로 꿰어맞춘 것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이에 대한 과학적 입증이 박창범 교수의 일본서기의 일식기록 분석입니다.
또한 전에도 말했듯이 왜의 풍습 중 유명한 것이 몸에 문신을 새기고 주사를 바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풍습은 홍콩 지역에선 아직도 널리 행해지나 일본에는 없는 풍습입니다. 지금 일본 사학계에선 일본이 일찍이 일본열도에서 양쯔 강 이남 지역으로 진출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어찌보면 반은 맞는 말입니다. 다만 틀렸다면 본래 왜가 그 지역에 있었던 것이죠.
진실만 밝힌다는 플러스코리아에 이런 식민사학에 물든 이들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 알 수가 없군요. 부여가 사비성이란 증거를 대 보시죠. 부여 근처에 어느 강이 사자수입니까? 또 당평백제비에 부여는 내지성이라고 새겨져 있지 사비성이라고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 한반도 어느 지역에 백제 패망시 지명이 있는지 들고 와 보시죠? 전 최근에 발행된 중국 지도에서도 5개 정도 찾았습니다. 평원, 침현, 제성, 박산, 독산 등 입니다. 위 지명들 중 평원, 침현, 독산은 김부식도 모른다고 한 지명입니다. 어찌하면 땅덩이를 넓혀볼까하고 고심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면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국민들에게 알릴까하고 고심하는 것이 우리 사학 계열입니다. 성훈씨 말대로 자기 이름 하나 당당히 밝히지 못 하는 건 비겁한 자들이죠. 실명을 밝히고 정정당당히 대결합시다.
[왜]문제..... 08/05/01 [23:08] 수정 삭제  
  조재범님 식민사관으로 매도하시면 안되지요. 어디 한반도에만 백제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겁니까? 한반도는 백제본국이고 중국은 백제 식민지들에 불과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거지요. 님은 오로지 한반도에 고구려신라백제를 가두려는 반도사관의 개념도 모르나 봅니다. 그리고 오로지 중국에다만 가두려는 님들의 역사관 또한 반도사관과 크게 다를바 없는 문제투성이의 연구방법일 뿐입니다. 고고학이 문헌보다 더 중요한 객관적 근거자료입니다. 고고학을 기본자료로 하면서 연구하기 바라겠습니다. 가능한 열린 마음과 열린 사고로 폭넓게 연구하기를 바라겠습니다. 역사를 알려는 이유는 과거에서 길을 찾고 미래를 여는데 있는 것이지, 땅덩이를 어케하면 더 넓히까하는데 있지는 않소이다. 역사는 그대로 진실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고 왜곡은 범죄행위요!

삼국사기와 무녕왕릉 지석문의 사망일시가 523년 계묘 5월로 동일하고,'사마'라는 이름이 동일하고, 황제나 천자승하시 표기되는 '붕어'라는 명확한 증거도 인정을 못하는 사람이 왜 역사연구를 하나요? 객관적 사실을 부인하는 사고자체는 학문하는 사람의 기본자세가 아닙니다.

그리고 [왜]문제는 [삼국사기]와 [한단고기]에 잘 기록되어 있죠...님들이 말한 는 중국 남부해안지역의 해적들을 의미하는 듯 하오! 그래서 한반도를 고대로부터 자주 노략질하고 반란을 일으킨 일본 원주민들도 또한 라고 부르지 않았나 싶구려..즉, 란 섬들이나 해안가에 거주하면서 노략질하는 불법 해적들을 총징했다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듯 하오! 그런 차원에서 님들의 오류는 일본열도의 를 중국 남부의 로 착각한 나머지 짜 맞추려다 보니 인식오류가 발생하는 듯 하오! 대마도를 대만이 아닌가 하는 식의 오류말이오.한단고기에는 대마도가 한반도 남부의 삼한이 서로 다투어 소유하려던 섬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아무튼 에 대한 내용들 참조하시요.

[한단고기-태백일사-고구려 본기]"왜(倭)는 회계군(중국 절강성.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본거지]의 동쪽동아현의 동쪽에 있으며, 배로 9000리를 건너 나패(일본 규오슈 남쪽 난세이 제도에 딸린 오끼나와 섬 남단에 위치)에 이른다. 또 다시 1000리를 건너서 네시마에 이른다. 네시마는 역시 도시마라고 한다. 때에 구노인은 여왕과 서로 싸워 길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구야한국으로 가고자하는 쯔시마(쓰시마),가라산(가야산),지가도(후쿠오카)로부터 비로소 말로호자(말로국-읍루인들이 모여 살던 곳)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신라가 가장 많이 만난 나라는 고구려도 백제도 가야도 아니고 왜이다. 뿐만 아니라 왜는 신라본기가 가장 먼저 기록한 외국이기도 하다.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의 기록은 단 3개(열전포함 4)를 제외하고는 어떤 다른 사서에 나오지 않는 특이한 기록들이다.

(중략)

가. 史料상으로 살펴본 신라본기의 왜

1. 6세기 이전의 신라가 가장 많이 만난 나라가 왜이다. 분량에 있어서 왜의 기록은 가야 전체의 기록보다 2.5배 이고, 남가야(금관가야) 기록만 따지면 거의 3배에 이른다. (중략) 이것이 자연스러우려면 신라와 왜가 모두 한반도에 있었던가, 아니면 모두 일본열도에 있어야 할 것이다.

(중략)

3. 43개의 왜 기록 중 신라본기에서 사람의 실명이 거론되는 기록이 딱 3개인데(비미호, 미사흔, 박제상) 이 3개의 기록만 다른 사서와 일치한다. 그리고 다른 기록들은 동양의 어느 사서에도 안 나오는 기록들이다. 이는 이들이 백제본기에 나오는 왜도 아니고,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왜도 아니고, 중국사서에 나오는 왜도 아니고, 일본서기를 쓴 왜도 아닌 다른 존재라고 보아야 한다. 참고로 백제본기에 나오는 왜는 모두 일본서기와 해는 물론 달까지 일치하는 것으로부터 일본열도에 있는 왜임을 알 수 있다.

4. 왜는 가야보다 훨씬 강한 나라이다. 가야의 기록에는 약 270년에 이르는 기록의 공백이 있어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나뉘는데 비하여, 왜의 기록에는 그런 공백 따위는 없고 오히려 가야의 기록이 없는 시절에 왜는 倭兵, 倭國, 倭王이라는 강력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전기가야는 신라보다 약간 우세하고, 후기가야는 신라보다 약간 열세로 전체적으로 신라와 비슷한 세력이나, 왜는 신라보다 일반적으로 강하며 특히 중기왜는 훨씬 강력한 세력이다.

(중략)

7. (6)번(지마이사금 11년 4월 조 - 인용자)을 보면 왜인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아 백성들이 대거 산으로 피신하는 혼란이 생기는데 이는 왜가 신라에서 아주 가까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왜가 바다 건너에 있었다면 소문만으로 신빙성을 가지기 어렵고, 또 바다를 건너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므로 급하게 산으로 피난 갈 까닭도 없다.

8. (8)번(아달라이사금 5년 3월 조 - 인용자)을 보면 한반도 중남부의 요소인 죽령을 개통하였는데 백제인이나 가야인이 아니고 왜인이 온다. 이는 한반도 중앙 내륙에 존재한 죽령의 개통이 왜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만일 일본열도에 있는 세력이라면 한반도 내륙에 어떤 고개가 개통되었건 이해가 걸릴 리 없다.

9. (10)번(벌휴이사금 10년 6월 조 - 인용자)을 보면 여름에 왜국에 큰 기근이 들어 천여명이 걸식하러 온다. 그리고 해적이 아니고 빈민이다. 이 왜인들이 일본에 있었다면 일본에서 식량을 구하지, 무리하게 바다를 건너 그것도 적국인 신라에 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굶어죽기 직전에 찾아간 신라는 가까운 곳이었고 도와줄 만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중략)

12. 4세기의 기록 ..... (중략) ..... 을 보면 왜는 국가다. 그러나 4세기에 일본열도에는 국가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3, 5세기에는 중국에 왜국 사신이 오나, 4세기와 6세기에는 왜국에서 사신이 안 온다. 일본의 4세기는 전기고분시대로 올망졸망한 고분들이 서로 경쟁하는 체제라서 고고학적으로도 국가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고고학적으로 일본에 권력이 나타나는 것은 정복자의 출현을 뜻하는 거대고분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5세기 초이다.

(중략)

가야-신라 사이의 고고학적 遺物의 우월은 가야-신라 관계를 따라가지 않고 신라본기의 왜-신라 관계를 따라간다. 가야지역과 경주지역의 遺物이 비등할 때는 왜와 신라도 비등하며, 가야지역의 遺物이 경주지역보다 우월할 때는 왜가 신라보다 강성하다. 그리고 경주지역 遺物이 가야지역 遺物보다 훨씬 우월해지자 신라본기에서 왜가 사라진다. 따라서 고고학적으로 보면 신라본기의 가야가 가야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왜가 가야사를 반영한다.

(중략)

6세기 초 지증왕대를 끝으로 왜가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는 신라를 괴롭히는 일이 없다. 지증왕대는 신라가 강성해져 공격적이 되는 시기로서 바다 건너 우산국까지 점령한다. 또한 이 직후인 법흥-진흥왕대는 신라가 가야제국을 합병하고 한반도 동남부를 석권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신라본기에서 왜의 사라짐은 신라에게 멸망당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왜가 멸망당하는 과정이 신라본기에 없는 것은 어떤 까닭으로 빠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보도자료 08/05/01 [23:29] 수정 삭제  
  * 백제 수도(공주.부여)문제와 관련한 고고학적 보도자료

박성민기자

전북 익산 왕궁리 5층석탑 주변 발굴조사결과 백제 무왕때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성 내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고대 궁성 구조 및 변천과정 연구에 도움을 주는 관련자료 1천여점을 수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익산시가 왕궁리 유적복원자료로 활용할 목적으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발굴조사를 의뢰해 지난해12월부터 2만3000㎡면적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여 왔다.

이일대 발굴조사는 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난89년부터 지난해말까지 15년동안 발굴 조사를 해와 석축성벽의 규모가 남북 492m, 동서 234m의 대규모의 왕궁성 및 사찰 관련시설로 판명됐고 성벽과 관련된 문지, 수구, 암거, 포석시설 등의 지하유구검출 및 명문와, 연화문와당, 도가니 등 총 3,000여점의 중요유물 출토하는 성과를 얻어 이번에 익산시가 정밀발굴조사에 나서게 된 것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16일 오전 관계전문가들로부터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과 자료를 검토하는 지도회의를 개최했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이번 조사를 통해 백제문화권 중장기 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익산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백제 무왕(武王)대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성(王宮城)의 내부구조를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곳에는 왕궁사(王宮寺)명 기와 및 각종 토기류, 금귀공품, 중국청자편 등 관련 자료를 비롯하여 고대 궁성의 구조와 변천과정 연구에 도움이 되는 고고자료와 1,000여점의 유물을 수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연구소는 밝혔다.

익산 왕궁리유적은 백제 30대 무왕(A.D. 600~641년)의 익산지역 경영계획에 의해 조성된 고대의 궁성(宮城)유적으로 남북길이 490m, 동서너비 240여m에 이르는 장방형 성벽으로 구획되어 있다.

지난3월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오층석탑 주변지역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에서는 왕궁성의 내부구조를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는데 왕궁성내의 남쪽지역은 계획적으로 대지의 비율이 2:1:2:1의 일정한 비율로 나누어지도록 동서방향의 석축을 4곳에 쌓아 넓은 계단상의 대지를 조성하였고 각 석축사이에 마련된 대지상에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배치되었음이 밝혀졌다.

특히 기단토를 판축하여 조성한 길이 16.4m, 너비 12.5m의 대형건물지와 기와를 여러겹으로 쌓아올려 건물의 기단(基壇)을 마련한 와적기단건물지, 기묘한 형상을 이룬 정원석(庭園石)과 석축으로 오르는 승강시설(月臺) 등 일반 건축물에서는 보기 드문 각종 부속시설이 발견되었고, 궁성의 정면에 해당되는 남성벽에는 중문지(中門址)로 추정되는 건물의 흔적이 확인되어 왕궁성의 구조 및 공간구획의 계획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서북지역에 대한 정밀조사에서는 동서로 길게 설치된 석축배수로와 서성벽 아래로 이어진 암거시설이 양호한 상태로 확인되었고, 백제시대의 화장실로 파악되는 대형수혈(竪穴)도 모두 3기가 조사되었다.

수혈은 길이 10m내외, 너비 1.8m내외, 깊이 3.4m정도의 깊은 구덩이를 파내고 내부에 직경 10cm전후의 나무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하였는데, 이중 1호 수혈내에서는 다량의 기생충란(회충,편충,간흡충 등)이 토양분석 결과 확인되었으며, 용변 후 뒤처리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길이 20cm내외의 나무막대가 50여점 출토되어 고대(古代)의 화장실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 동안 국내에서 발굴조사된 유적에서 기생충란이 발견된 예는 광주 신창동유적, 대구 칠곡 등에서 소량 발견된 바는 있으나 왕궁리유적과 같이 다량의 기생충란과 화장실유구가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삼국시대 화장실의 형태와 함께 당시 사람들의 병리학 및 실생활 관련 정보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방지와 관련된 폐기장에서는 도가니편과 정교하게 가공된 금못, 금사(金絲)를 비롯하여 유리파편 등 삼국시대 귀금속 관련 각종공예품의 제작과정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조사결과 왕궁성의 서북지역은 궁성내부의 공간구획상 공방지 등의 작업장이 넓게 분포하였던 곳으로 추정되며 궁성에서 필요한 각종 소모품을 생산, 조달하던 곳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17일 일반인을 위한 현장설명회를 개최한다.

2004/12/17 [12:04] ⓒ 브레이크 전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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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도읍기 백제 절터 최초 발굴

풍납토성 경당지구서 확인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최초로 건립된 절터의 목탑터로 추정되는 유적이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안에서 발굴됐다.

한신대박물관은 아파트 건축이 추진되다가 2000년 사적 지정이 이뤄지고 현장 보존조치된 경당지구를 지난 2월말부터 서울시 의뢰로 발굴조사한 결과, 종래 연못터로 추정되던 206호 유구(遺構)가 목탑 기단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확인했다고 29일 밝혔다.

책임조사원인 권오영 한신대 교수는 "이 유적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되며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라 단언키는 어려우나 목탑터로 확인될 경우,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유적 중에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목탑터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권 교수는 나아가 "고대사에서 왕성 안에 사원이 배치되는 예는 흔히 있는 일이므로 풍납토성 내에서 사원 유구가 확인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강조했다.

이 유적이 목탑터로 확인되면, 한성도읍기 백제(BC 18-AD 475)에서 처음으로 발굴되는 불교유적인 동시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처럼 침류왕 원년에 백제에 불교가 도입되고 그 이듬해에 봄 2월에 도읍인 한산(漢山)에 세운 절터의 흔적일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관측된다.

206호 유구의 추정 목탑터는 한 변 길이 10여m에 깊이 3m 가량 되는 방형(方形) 구덩이를 굴착한 다음 그 내부를 점토와 사질토로 교대로 판축(版築.다짐)한 후 다시 그 위에 점성이 적은 모래질 점토를 채운 것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만든 기단 중심부에는 다시 지름 2.5m 정도 범위로 굴착하고 깬돌을 가득 채운 것으로 나타났다.

권 교수는 "이 구조물과 유사한 형태는 사비시대 백제 목탑터 등지에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현 단계에서는 목탑이 있던 곳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이 유적 상층부에서는 불교와 밀접한 연화문 와당이 출토되기도 했다.

역사의 진실 08/05/02 [08:38] 수정 삭제  
  보도자료의 유물은 다 조작된 가짜.
풍납토성은 고구려 양식. 장군총과 같은 피라밋인데 그게 백제 양식인가? 뭐 근초고왕 무덤이라고? 토기에 있는 대부(大夫)라는 명문은 고구려 관직인데 백제 것이라고 거짓말한 식민사학자들
의문투성이의 무녕왕릉은 가짜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왕능이 다른 무덤과 붙어 있다? 그런 왕릉도 있나?
* 지석의 사마의 마라는 한자가 틀리다. 왕의 무덤의 지석을 그런 식으로 팠다고?
* 발굴 몇시간 만에 덮은 이유는? 항상 한국의 유물 발굴 전 맨 앞에는 일본 사학자들이 있다.
* 사마는 무녕왕의 이름인데 왕의 이름을 쓰는 무덤도 있나? 정조의 능에 '이산지묘'라고 쓴 것과 같은데 그걸 믿으라고?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 맹목적으로 추종하면 그 사람이 식민사학이다.
역사의 진실을 알자. 지금까지 한국의 사학자들은 너무도 많은 거짓말을 해왔다. 그 뒤에는 일본사학자들이 로보트 리모콘으로 한국학자들을 조정하고 있다. 이게 식민사학이다.
사가 08/05/02 [09:00] 수정 삭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말하는 제2자는 혈연관계가 아닌 아들입니다. 백제본기의 왕력기록원칙에 따르면 무령은 동성의 제2자가 맞습니다. 반면에 일본서기는 혈연관계로 쓰고 있어서 다를 뿐입니다. 백제 뿐만 아니라 신라도 비슷합니다.
조재범 08/05/02 [21:02] 수정 삭제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사람들이 한반도 중심 사관에서 버리지 못해서 큰일입니다. 결정적으로 백제의 본국이 대륙에 있다는 증거를 댈까요? 마침 일본서기 이야기가 나왔으니 일본서기로 승부해야겠습니다.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 성명왕(성왕)이 부남의 포로와 낙타를 바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남은 베트남 인근 지역입니다. 게다가 낙타는 한반도에선 자생하지 않는 동물입니다. 이런데도 백제의 본국이 한반도고 속주가 대륙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다른 과학적인 측면에서 지질학을 예로 듭시다. 삼국사기엔 백제의 지진 기록이 17회 있는데 그 중 4회가 강진입니다. 한반도는 판 경계부와 인접한 지역도 아니고 지진대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지도 않아 강진이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큰 지진 중에 홍성 지진도 엄밀히는 강진이 아닙니다. 리히터 규모 7.0 이상을 강진이라 하는데 홍성 지진은 5.9였거든요. 백제가 있었던 산동성 지역은 지진대가 지나가는 길목이므로 강진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백제의 분서왕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됩니다. '일곱 살 검객 황창랑'이야기 아시죠? 그것이 그 이야기 입니다. 설마 아직도 낙랑군이 평양 인근 지역에 있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겠죠? 즉, 이는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자꾸 무령왕릉 가지고 소모전을 벌이는데요. 시호를 올리지 않고 왕의 이름을 새긴 왕릉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로 듭시다. 자꾸 사마를 이두식 표기 운운하는데 고유명사는 이두식 표기로 쓰는 법이 없습니다. 제 이름도 보십시오. 이 나라엔 조재범이란 이름을 쓰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선 저와 같은 한자를 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물며 한자가 다른데 같다고 볼 수 있습니까? 게다가 자꾸 사마왕의 죽음 연대가 무령왕의 사망시기와 유사하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같은 날에 죽었다고 이 인물이 같다고 할 수 있습니까? 게다가 무령왕의 즉위 연대는 501년인데 이는 삼국사기에만 있고 왕릉의 지석에는 없습니다. 왜 즉위 연대를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기록할 수가 없었겠죠. 이 사람은 정통 승계왕이 아니고 분봉왕이니까. 게다가 붕어란 말은 분봉왕도 쓸 수 있습니다. 황제가 아닌 조조도 죽을 때 붕어를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에도 지적했듯이 황제같은 최고 통치자의 죽음은 붕어가 아니라 훙을 씁니다. 사서를 뒤져보시죠. 어디에 임금이 몇 년도에 붕어했다고 나오는지. 다 훙했다라고 나옵니다.
백제 8대 성씨를 예로 듭시다. 백제 8대 성씨는 국(國), 사(沙), 목(木), 해(解), 진(眞), 연(燕), 협 씨, 백 씨인데 이 중 한반도에 남은 것은 국, 진, 연 3개 뿐입니다. 나머지는 한 명도 없어요. 그러나 중국에는 8개 모두 다 있습니다. 그나마 남은 3개 성씨의 인원은 다 합쳐도 3,000명도 안 됩니다. 뭐, 이 가문들이 다 절손했습니까? 성씨를 바꿨다면 무슨 기록이라도 남겠다만 김부식은 목씨와 목협씨도 구분을 못했습니다. 이는 그런 기록이 없다는 것이겠죠. 확실히 백제의 본국은 대륙에 있었고 한반도가 진출지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위 3성씨는 진출지로 넘어온 관리들의 일족이겠죠. 이제 더는 논쟁하고 싶지 않군요. 만일 백제 무령왕릉이 공주에 있다면 김부식이 왜 기록을 안 했는지도 설명해주시죠. 님들은 사람 이름을 자기 맘대로 씁니까?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쓸때 간혹 다른 자로 씁니까? 그리고 같은 날짜에 죽으면 다 같은 인물입니까? 즉위 연대를 모르는 왕이 있습니까? 왜 자꾸 제가 즉위 연대에 대해 질문할 때마다 딴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무령왕릉에 즉위 연대가 빠져 있는 이유를 설명해주시죠. 그리고 왕릉이 왜 다른 무덤과 붙어있는지도 설명해주시죠. 이는 백제 분봉왕 사마왕릉이 확실합니다.
개그들 하시네 08/05/03 [18:47] 수정 삭제  
  동성왕이 37세에 죽었고, 사마 무녕왕이 40세에 왕위에 올랐는데(공주 무녕왕릉 지석문과 삼국사기 내용의 사망시기가 일치함이 증명), 부자관계라는 사람들이 제정신입니까? 동성왕이 3살에 무녕왕을 낳았다는 소리네..ㅋ..이 보시요들 개그하지 마시요..백제사의 비밀을 기록하고 있는 [일본서기]가 정확히 개로왕과 개로왕의 동생들인 문주왕과 곤지, 그리고 일본열도로 피신 중에 섬에서 출생하여 곤지에게 길러진 개로왕의 친아들인 사마 무녕왕과 곤지의 둘째 아들 동성왕에 대해 알려 주고 있습니다. 어디가서 민족사학이라 하지 마시요. 땅속에서 토해내는 고고학적 근거자료도 부인하는 자들이 무슨 역사연구을 한다는 거요..자기들 논리에 맞으면 맞는 것이고 안 맞으면 거부한다는 그런 사고는 광우병 사고요?ㅎ
바로 알자 08/05/03 [19:13] 수정 삭제  
  ▶ 참고문헌

三國史記,
魏書,
宋書,
日本書紀,

================[문헌비교도 정확히 해서 역사공부 제대로 공부합시다

개로왕이 왕위에 오르자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왕족 중심의 왕권 강화책을 펼쳐나갔다. 458년 개로왕은 관직을 제수해주도록 요청하기 위해 11명의 명단을 중국의 남소에 보낸다. 그런데 이들 명단 가운데 8명이 왕족인 여씨이다. 여기에는 개로왕의 동생 여도(뒤에 문주왕이 됨), 여곤(곤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에 당시 가장 큰 세력을 갖고 있던 진씨와 해씨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여곤은 정로장군 좌현왕을 제수받았다. 좌현왕은 원래 흉노나 돌궐의 관직으로, 군왕의 후계자 자격을 갖고 있고 동시에 병권을 장악할 수 있는 관직이었다. 귀족들이 갖고 있는 병권을 동생인 여곤이 장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아울러 여도는 최고 관직인 상좌평에 임명되었다. 결국 여곤(곤지)이 정치와 병권을 모두 왕족이 쥐게 된 셈이다. 그 만큼 개로왕이 곤지를 신뢰하고 능력을 인정했다는 의미가 되며, 그러한 곤지에게서 중국의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동성왕이 아들로 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로왕은 스스로 대왕이라 자처하고 나섰다. 아울러 황제국의 체제를 모방하여 신하들을 왕, 후, 태수로 임명하였다. 백제식의 천하 질서로 갖추면서 강력한 왕권을 세우도록 한 것이다. 고구려에 대패해서 문제였지만, 개로왕은 이런 면에서 백제부흥을 꿈꾼 야망있는 왕이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개로왕은 대규모 토목 공사를 시작하였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다. 토성과 궁성을 새로 증축하고 누각도 크게 지었다. 왕릉도 새로 만들었고, 한강변에 제방도 쌓았다. 그리고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외교 정책을 펼쳤다.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할 때 신라군을 도와주었고, 개로왕이 위기에 쳐했을 때 신라도 개로왕 동생 여도에게 군사 1만명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물길, 북위와도 연합해 고구려를 협공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고구려를 고립시키려는 백제의 전략은 도리어 고구려를 자극하여 장수왕은 475년 백제를 대대적으로 침공하게 되었다. 30여 년에 걸친 백제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 백제에서는 빈번한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해 민심이 왕실을 떠나 있었다. 백제는 변변히 싸움 한 번 제대로 못한 채 한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내가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해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는 바람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들은 고통받고 병사들은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누가 나를 위해 힘써 싸우겠는가." 라는 개로왕의 탄식은 너무 때가 늦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 도읍을 쳐서 개로왕을 아차산성에 끌고가 모욕주며 죽였다. 이 싸움에 왕 뿐만 아니라 태후, 왕자들이 모두 죽었으며 8,000여 명이 고구려의 포로로 끌려갔다. 이로써 개로왕의 왕권 강화 노력은 일단 수포로 돌아갔고 도미설화와 도림의 이야기에 전해지는 개로왕의 부정적 인식은 패전의 책임을 개로왕의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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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은 동생 여도(문주왕)에게 백제의 재건을 부탁하고 여곤(곤지)에게 사마(무녕왕)을 임신한 왕비를 호족들에게 변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안전한 곳으로 부탁한 것이다. 그래서 곤지는 왕비를 데리고 일본열도로 피신하다가 섬에서 사마를 낳은 것이다.
삼국사기 08/05/04 [11:06] 수정 삭제  
  삼국사기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21대 개로왕의 아들은 22대 문주왕과 곤지, 23대 삼근왕은 문주왕의 아들, 24대 동성왕은 곤지의 아들, 25대 무녕왕은 동성왕의 아들, 26대 성왕은 무녕왕의 아들

백제사마왕이 무녕왕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사마는 이름인데 이름뒤에 왕이라고 부치는 경우가 어디있는가? 정조임금을 '이산왕'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

공주 사마왕능 바로 옆에 다른 무덤이 붙어있다. 왕능을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그래서 사마왕은 무녕왕이 아니라 무강왕과 같은 분국의 왕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무녕왕이 몇세에 승하했는지는 사서 기록에는 없고, 지석에만 나와 있다. 공주 사마왕능은 의문투성이로 무녕왕으로 단정지울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사마왕이 무녕왕이라 하여 공주가 백제의 수도라고 말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일본열도에 예전부터 자기네가 살았다는 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조작이다.

백제 의지왕이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한다. 그 웅진은 산동성에 있다. 위 글의 논리에는 답을 못하고 공주 사마왕능을 무녕왕능이라고 우기고 있다. 남당 박창화선생의 고구려 사초에 보면 무녕왕은 독살당한다.

분명한 것은 웅진은 중국대륙 산동성에 있다. 한반도 공주가 아니다.
의자왕 08/05/05 [08:20] 수정 삭제  
  삼국유사,백제본기 의자왕21년기를 보면 신라군과 13만 당군이 사비성을 공격해오니 의자왕의 태자가 북변의 웅진성으로 달아났다. 미처 피하지 못한 의자왕의 손자 문사는 좌우신료와 백성들을 이끌고 당군에 투항한다.또한 일본서기,신 구당서,동이열전내용에도 의자왕과 왕비 은고, 태자 융등 13인의 왕족과 대좌평 사택천복,국변성 등 신료37인등 50여명이 당고종에게 헌상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충남 공주와 부여는 문헌상 백제의 고도가 확실한데도 중국땅에 백제서울이 있다는 새로운 설을 내세운 성훈님은 몽상가일뿐 설득력이 없습니다.

또한 삼국유사,사기에는 소정방이 백제국왕 의자및 태자,왕자,대신,장사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는 기록이 상세히 하다. 무슨근거로 중구땅에 백제가 있었고 신라가 바다건너 백제와 싸운걸까? 토론의 일말의 가치도 없다. 기록이 설영 승자의 것이라 하나 전혀 근거없는 기록은 아니다. 백제본기,태종춘추공조에는 1만2천807명 포로라 상세히 기록됐다. 성훈님의 주장은 추론만 내세우는 것은 매우위험한 발상이다. 걸핏하면 식민사관이라 매도하는 폭격은 금물이다. AD30년 그림에는 동신라가 한반도와 요동반도 만주 북방까지며 서신라가 중국땅에 있고 백제는 그위에 매미처럼 붙어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승자 신라에대한 사대사상이라 하겠다. 백제는 그렇게 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고구려의 부여라는 수도 이름을 따 충남 부여역시 백제 서울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문헌상추론이다. 대륙이니 한반도 식민사관이니 국수주의에 빠지지말고 역사는 진실해야한다.
그당시 당은 동아시아의 최고의 문명도시요 강국임에 틀림없다. 쓸데없는 논쟁은 시간 낭비다. 역사는 혼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공유할수 있고 공감대를 형성해야 인정받을수 있다. 새로운 학설, 역사 발굴은 인정하지만 하루아침에 뒤엎는 개혁의지라면 생명력이 없는 자멸의 길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역사는 기록과 고증의 유물과 증표가 제1순위임을 말해두고 싶다.
성훈 칼럼리스트 08/05/05 [09:48] 수정 삭제  
  부여와 공주가 백제의 수도라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없다. 일제의 식민사관이 만들어 놓은 이론이다. 분명 백제의 수도는 사비와 웅진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둘 다 산동성에 있다.

의자왕이 만이천명과 함께 당으로 끌려간 것은 사실이나 한반도 부여라고 적혀있지 않다. (산동성) 사비성에서 출발한 것이 맞다.
역사적 사실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에 누군가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백제가 한반도에 있다는 것은 식민사관으로 일제와 이병도가 만든 것이다. 이젠 그 거짓말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위 본문 글만 읽어봐도 백제는 한반도에 없었던 것이 확실하다.
라디오 08/05/06 [07:31] 수정 삭제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를 봐도..정약용은 반도사관의 시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성훈님의 논리라면 이병도를 비판하기전에 정약용을 비판해야 합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북방강역이 축소가 된 이후에 신라가 우리민족의 정통성이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반도사관이 싹튼거라고 봅니다.
중립사학 08/05/06 [21:54] 수정 삭제  
  이게 다 마한과 낙랑이 어디있는지도 모르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위치를 억지로 끌어 맞추어서 그런거죠.
마한과 낙랑을 모르면서 백제가 산동에 있다, 경기도에 있다, 충청도에 있다라고 하는 것은 다 견강부회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훈님
백제를 논하기 전에 마한과 낙랑의 위치를 먼저 파악하셔야 합니다.
낙랑은 낙랑군도 아니고 최씨의 낙랑국도 아닌데

변진 12국 중에 樂奴國이라고 있습니다. 浪이나 奴나 다 "나라"를 뜻하는 이두문으로서 백제의 동쪽에 있다고 한 낙랑국은 樂奴國을 김부식이 잘못알고 쓴 것이죠.

삼국사기 마한은 삼국지에 나오는 마한도 아닌데 이것은 지나사서에 鮮(明)國 혹은 南殷입니다. 대체로 殷나라 도읍과 비슷하거나 그 남쪽이죠. 그래서 기준이 鮮國師가 되었다라고 이상하게 쓴 것입니다.

따라서 백제는 산동의 북쪽과 요하의 서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고구려 영토라고 알고 있는 곳은 대체로 백제의 영토입니다. 백제의 도읍은 산동도 한반도도 아닙니다. 모두들 헛다리짚고 계십니다.
중립사학 08/05/06 [22:12] 수정 삭제  
  글을 쓸때 자기가 인용한 것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도 모르면서 글을 쓰면 안됩니다.
일식분석한 백제 그래프는 분명히 백제는 북경근처군요.
근대 왜 산동반도라고 우기십니까?
쥬신사.. 바로 알자 08/05/08 [03:12] 수정 삭제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 보면 비류세력들이 "온조세력에게 땅을 가지고 귀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즉, 고추모아들 유리에게 왕권을 빼앗긴 비류백제는 만주에서 고구려와 대항하면서 요서지역으로 밀려나다 결국 북방유목민족인 전연에게 대패하여 고구려 대무신왕때는 1000여명이 고구려에 투항하기도 한다(중국사서)..[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서 비류백제가 땅을 가지고 온조백제에게 귀순했다는 내용에서 비류백제가 가진 땅이란 아마도 요서지역으로 보며, 귀순한 시기는 근초고왕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요서지역을 거점으로 백제는 근초고.근구수왕때 중원으로 깊숙이 진출하였고, 중국 동남부.동남아 지역으로도 세력을 펼친 것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토대위에서 동성왕때는 북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고 본다.

그래서 겨우 마한땅의 일부를 얻어 정착하던 백제가 근초고왕때 갑자기 강력해진 이유가 되며 한반도 남부지역[본래 한반도 전역이 마한지역이였으나, 번조선이 망하고 진한의 권력체계가 무너지면서 한반도 북부지역에도 최씨 낙랑국.대방국 등 마한의 제후국들이 자치국가를 건설하면서 남부지역으로 좁혀지면서 당시 목지국(나주지역)을 수도로 삼고 있는 마한은 박혁거세 세력이 유입되기 전까지 변한(경상 남해)과 진한(경상 동해지역)의 조공을 받는 맹주..마한은 52여개국으로 나온다]지역에 해당하는 마한지역을 접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부여 해모수의 서손자에 해당하는 소서노의 죽은 남편 구태(우태)의 아들인 비류백제세력이 고구려의 왕위를 유리에게 빼앗기자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온조백제와 합류하기 전까지 만주지역과 요서지역에 잔류했고, 고추모의 친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온조와 소서노는 비류보다 먼저 "서쪽으로 대해가 펼쳐진 남쪽지역으로 내려와"(한단고기-고구려본기 기록) 큰 사업을 하게 됩니다. 소서노가 머물렀던 지역이 바로 지금의 북한 예성강 지역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관련유적유물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세력도 확보하여 살만하게된 소서노가 사랑하는 고추모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니 고추모도 기뻐한 나머지 여왕이라는 의미의 '어하라'라는 칭호를 내립니다(한단고기 -고구려 본기).

마한이 쇠퇴한다고 하니 더 내려가는게 좋다는 신하들의 제안을 수용한 온조가 신하100명을 데리고 배를 타고 도착하여 터를 잡은 곳이 바로 백제 초기 한성(한강이남=하남 위례성)입니다....이미 풍납토성발굴을 통하여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고 있지요..삼국사기에 한성의 위치는 서쪽으로 대하(큰 바다)가 펼쳐져 있고, 한수이남으로 평야가 펼쳐진 땅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한단고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공통적으로 "서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으니"..서쪽에 바다가 없는 중국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마한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마한에 해당하는 한반도가 되는 것이죠. 이걸 부정한다면 역사연구할 필요없죠. 그리고 온조백제의 초기 국명은 신하 100명을 데리고 남하했으니 '십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백제는 단군왕검때 산동반도에 쌓은 10개 성중에 '백제'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기원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럼 왜 같은 동족인 백제와 고구려가 잡아 먹을듯이 싸웠을까요? 그것은 부여의 정통성을 누가 계승했는지의 싸움이라고 봐야 겠지요.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는 고리(코리)국 종손이라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소서노의 할아버지 고두막한은 47대 고열가 단군의 직계후손입니다. 고추모는 본래 성이 해씨고, 소서노는 고씨라고 봐야지요..그런데, 고추모가 소서노의 세력을 업고 고구려를 건국하게 되고 유리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니 해모수의 서손 구태(우태)의 아들 비류가 열받은거지요. 그래서 소서노와 온조와 같이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고 만주에 잔류하며 고구려에 시위를 하게 된 거고..온조가 만약 구태의 친아들이라면 비류와 함께 만주에 남아서 함께 고구려에 대적했겠지요..온조는 고추모의 친아들이니 아버지에게 칼을 겨눌 수 없었다고 봐야죠.

단군조선-부여-고구려는 국명이 다를 뿐 사실 하나의 민족이죠..그 뿌리를 올라가 보면 중국사서에 [예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맥]은 알타이에서 이동해온 북방유목이고, [예]는 만주와 한반도의 토착민들로 보입니다. [맥]은 청동기문명을 가지고 기원전 8세기에 중국사서에 등장하는데, 알타이에서 탁록을 걸쳐 요하지역을 걸쳐 요동지역을 걸쳐 송하강 지역을 걸쳐 몽골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맥]이 [예]을 복속융합하고 [예맥족]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사서에 [맥]은 사나운 기질로 기록되어 있고, [예]는 유순한 기질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맥]이 지배세력이고 [예]는 피지배세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중국사서는 이 [맥]을 단군조선과 고구려와 일치시키고 부여는[예]족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부여지역에 해당하는 만주.송화강.시베리아 지역이 [예족]의 지역이였음을 알 수 있고, 이 예족이 사는 땅에 맥족이 유입되어 융합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선[쥬신]할 때는 [예족]보다는 알타이지역에서 청동기문명을 가지고 들어온 [맥=단군족]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의 패권싸움은 본질적으로 이 [맥]족의 정통성을 차지하겠다는 싸움으로 보아야 바른 이해가 되리라 봅니다. 물론, 단군조선의 유민들로 구성된 신라도 쥬신에 속합니다. 신라의 국쇄가 [무궁화]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진한에 해당하는 단군족은 '무궁화을 숭상한 민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단군족과 무궁화,그리고 청동기'는 유라시아 대륙사에서 중요한 테마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한이란 국명은 바로 대단군이 통치하는 진한이니,단군조선(진한)의 47대 고열가단군을 마지막으로 권력체계가 무너진 이후 일찍이 북방의 진한사람들이 남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진한의 수도가 동해안과 가까운 송화강지역이고 진한에 해당하는 지역들이 동해안과 가까운 지역이니 배타면 해로따라 동해안 지역이나 경상도 지역으로 내려오기 쉽상이겠지요?이 진한지역으로 박혁거세 세력이 유입됩니다.

박혁거세가 부여 공주(성모)의 아들입니다. 남편을 모르는 박혁거세를 임신했다고 손가락질 당하자, 옥저로 피신했다가 다시 배를 타고 마한지역의 진한(6촌)으로 유입되어 진한의 수장이 되죠. 그러나, 신라초기에는 고구려와 백제보다 국력이 약하여 패권쟁탈에 참여할 염두를 못 느끼죠..북방유목민족인 흉노일파인 김알지 세력이 유입되면서 비로서 신라가 두각을 나타내게 되죠..그러나,고구려와 백제에 샌드위치된 신라가 한반도 코너에 위치하다보니 결국에는 흉노와 친분이 있는 선비족의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 삼한의 패권을 내세우나 그것은 너무나 반칙적인 방법이라고 봐야겠죠..그리고 고구려-백제의 시조들과 혈통적으로 가까운 박혁거세세력이 석씨와 흉노세력인 김알지 세력에게 쿠테타에 의해서 왕권을 찬탈당하면서 신라는 전통성이나 민족성면에서 고구려와 백제와는 좀 이질적인 있는 나라로 구분지어질 수 있죠..그러니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와 맺은 동맹을 아무런 부끄럼없이 위반하고 배신하면서까지 백제와 고구려를 칠수 밖에 없는 배경이 있다고 보아야겠죠. 만약 고구려가 마음만 먹으면 백제와 신라를 쳐서 직접 지배할 수 있으나, 굴복시키고 조공만 받는데, 이건 동족으로서 자치권을 인정하는 거지요. 백제도 마음만 먹으면 초기에 변한(가야)과 진한(신라)를 칠 수 있지만, 조공만 받지 자치권을 인정하지요. 그런데, 신라는 결국 외세와 손잡고 배신을 때려 버리면서 멸망시키고 말죠..이건 소수 흉노족의 일파인 김알지 세력이 자신들의 생존차원에서 자신들에게 굴복하지 않는 지역은 공격하여 자신들의 시스템으로 직접 지배하는 습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건 당시 백제와의 동맹관계를 먼저 파기하고 백제를 공격한 신라가 죽자살자로 덤비는 백제와 그러한 신라의 도움요청에도 응하지 않는 고구려에게 몰리게 되자 다급해진 나머지 기득권(당이 고구려와 백제땅을 차지한다)을 당나라에게 양보하면서까지 사대외교노선으로 동족을 몰살시켜버린 인과응보에 해당하는 신라의 민족적 악업에 해당한다 하겠죠.

그래서 신라우위의 신라사관은 민족적 차원에서 보면 식민사관이나 동북공정이나 사관이 동일하다고 밖에 볼 수 없죠. 신라사관은 신라내부적으로도 파렴치하고 민족적 차원에서 반민족적인 김알지 흉노세력에 대해 역사적으로 심판하지 않고서는 신라의 민족적 악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거시적으로 몽골.일본.한국(남북한).중국의 소수민족.터키.중앙아시아 민족들은 모두 우리 쥬신민족들로 교류협력하여 연방체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역사왜곡과 역사조작으로 이 대쥬신민족의 연대와 통일을 방해하거나 분열시키려는 식민사관.신라우위의 신라사관.중국의 동북공정은 공동의 적으로 삼아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 쥬신사였습니다.
성훈 08/05/08 [09:35] 수정 삭제  
  북경은 백제 일식의 최적관측지입니다. 즉 개기일식을 가장 정확히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그냥 일식이라고 나오지 개기일식인지 부분일식인지는 안 나옵니다.
그것을 기본으로 하여 사서의 기록을 추적해보니 산동성이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산동성에서는 부분일식을 볼 수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도 부분 일식을 볼 수는 있습니다만, 신라의 일식 기록 중 2개를 한반도에서는 전혀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습니다. 해서 백제도 한반도에 없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제 이해 하시겠습니까?
중립사학 08/05/08 [19:53] 수정 삭제  
  사서에 개기일식인지 부분일식인지 나오지도 않았는데 왜 임의로 "일식"을 부분일식으로 바꿔서 산동성으로 억지 추론을 하고 계십니까? 이건 옛날 이병도가 하던 짓과 똑같습니다. 동쪽의 진국을 남쪽의 진국으로 바꿨던것처럼 성훈 님은 지금 일식을 부분일식으로 바꿨습니다.
틀렸습니다.
님은 지금 백제는 산동성이라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모든 정황을 그리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산동성에 있다면 백제의 동쪽에 바다인데 "동유낙랑"이란 구절은 어떻게 해결하시려나요? 님의 주장은 엉터리입니다.

따라서 님은 방법론이 틀려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야죠.
우선 가설을 2개 세웁니다.
1) 백제는 북경이 중심지다
2) 백제는 산동성이 중심지다.

그리고 나서 지리지에 나오는 기록을 토대로 1)과 2) 중에 무엇이 맞는지 따져본 후에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님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군요.
산동성에 있다면 백제의 북쪽에 말갈이 있고,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으며, 백제의 서남에 마한이 있다는 기록이 해결되지 않으므로 2)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마한과 낙랑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신후 백제의 위치를 비정하세요. 백제는 산동성이 아니라 하북과 요서 유역인데 왜냐하면 이곳이 마한(산동성)의 동북쪽이고, 낙랑(변진의 樂奴國)의 서쪽이며 말갈의 남쪽이 됩니다.

성훈님이 그린 저 지도에서 백제의 강역을 북쪽으로 좀더 확장해야됩니다. 그리고 백제와 고구려 사이로 신라가 개주둥이처럼 삐쭉 튀어나와야 되는데 이 곳이 바로 당나라와 신라가 교류하던 당항성이 되는 것입니다. 성훈님처럼 지도를 그리면 당항성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중립사학님 08/05/08 [20:55] 수정 삭제  
  단군조선3한 관경 중 52여개국의 나라들이 있었던 마한은 한반도를 의미합니다...그 마한속에 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서해쪽에 바다가 있습니까? 참 어이들이 없습니다.
중립사학 08/05/09 [21:13] 수정 삭제  
  사서나 제대로 읽어보시고 말씀하세요.
마한 서쪽에 바다가 있다고 한 기록은 없습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1, 남은(南殷)에 대한 변증설.
"기자(箕子) 만년에 국세(國勢)가 미약해진 데다 또 위만(衛滿)의 난(亂)으로 인해 남쪽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것이 이른바 남은(南殷)이다.

기준이 남하한 곳은 殷나라 땅이라는 말입니다.

통지
三韓皆都帶方郡之東大海中東西以海為限
삼한은 대개 대방의 동쪽에 있다. 바다를 가운데에 두고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막히었다.

바다를 가운데 두고 삼한이 있다는 말은 발해와 서해를 가운데에 두고 삼한이 있다는 말이죠. 사서를 제대로 해독하지 않고 식민사학만 답습하지 마세요. 삼한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마한이 어찌 4천리 영토가 됩니까?

중립사학 08/05/09 [21:16] 수정 삭제  
  백제는 마한의 동북에 있다고 삼국사기에 말합니다.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합니다.
백제의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합니다.

님은 이것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땅에 적용하여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백제가 경기도면 낙랑은 강원도네요 하하
백제가 경기도면 말갈은 평안도네요. ㅋㅋ
백제가 경기도면 마한은 저기 바다가운데 빠져있네요.
말도안되는 식민사학을 답습하지 마세요.
조재범 08/05/12 [23:05] 수정 삭제  
  이것은 전적으로 성훈님이 백제의 건국지부터 제대로 밝히지 않은 탓에 생긴 소치라고 봅니다. 백제는 중국사서에서 말하기를 대방의 옛 땅에서 건국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그 대방이 어디냐? 대방은 요동군에서 분화된 것임을 [후한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요동 요서 구분법은 구 지명으로 요였던 산서성 좌권시를 기준으로 나눕니다. 요의 동쪽이 요동이고 요의 서쪽이 요서입니다. 그렇다면 요동은 하북성 지역을 뜻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대방은 동성왕이 설치한 7개 군 중 하나입니다. 이 7개 군 중 위치가 확실한 것은 광양,청하,성양,광릉인데 이 지명은 아직도 중국에서 그대로 씁니다. 즉 대방은 이곳과 인접한 곳이어야겠죠. 또한 광개토태왕릉비를 보면 왜군이 대방,석성까지 침범했다고 합니다. 석성은 삼국유명미상지방 중 하나인데요. 이것은 석성은 한반도엔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남제서]에 석성은 청하 서쪽에 석문과 함께 있다고 합니다. 대방은 석성과 인접한 곳이어야 합니다. 석문은 대방의 위치를 90%이상 결정지어줍니다. [삼국사기]엔 당군이 석문에 진을 치자 신라군이 대방에 진을 쳤다고 합니다. 석문은 중화민국까지 전승되어 오다 중화인민공화국 때 변경되었습니다. 지금의 석가장입니다. 사서의 기록대로 석가장은 청하 서쪽에 버젓이 있습니다. 또 마지막으로 대방군은 신라,발해,말갈이 나눠 가진 곳입니다. 즉, 의견을 모아보면 대방은 광양,청하,성양,광릉과 인접한 곳이며, 석성이랑 가깝고 석문과 마주보며 신라와 발해간의 경계가 되는 곳입니다. 즉, 하북성 지역에 있어야 한다는 거죠. 박창범 교수의 연구결과로 백제의 일식 최적관측지는 발해만이라고 나오는데 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백제의 건국지인 대방 지역이 바로 하북성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이상 백제의 본국이 한반도요, 진출지가 대륙이라는 케케묵은 옛말은 나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또한 백제의 첫 수도는 하남 위례성입니다. 그런데 김부식과 삼국사기 저자들은 위례성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왜 모른다고 했을까요? 당연합니다. 하북성에 있는 대방군 땅에 있을 위례성을 한반도에 사는 김부식이 어찌 알겠습니까? 게다가 그 하남 위례성은 하수의 남쪽에 있는 위례성이란 뜻입니다. 하수는 황하의 옛 이름입니다. 황하는 물줄기가 수도 없이 바뀌었는데 그 중에 하북성 중부 지역을 지나가는 때가 있었습니다. 위례성의 위치를 대략 짐작하실 수 있겠죠? 북경시 일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건국지이고, 패망시 지역이 산동성이란 것입니다. 백제는 삼국 중에서 가장 많이 천도한 나라입니다. 그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 중 웅진이란 곳은 [구당서]에서 '웅진의 동쪽에 대산(大山)이 있다'고 합니다. 대산은 태산의 옛 이름입니다. 즉, 웅진 시대때부터 중심지가 산동성이 된 것입니다. 하북성 지역은 고구려에 뺏겼어요. 사비는 사자수가 있는 곳인 것 같은데 중국 산동성 지역에 백마관에서 발원하여 사수와 자양 사이를 지나는 강이 있습니다. 이 강이 사자수로 보입니다. 즉, 웅진 시대 이후로 백제는 중심지가 산동성이 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중립사학님?
참역사 08/06/11 [23:47] 수정 삭제  
  저는 지금 이 글을 진심으로 읽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사는 나라에는 마치 절대적으로 그렇다고 믿게 만드는것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동안 20년 정도 밖에 안되는 삶을 사면서
어떠한 비판 정신도 없이 철저히 세뇌당한듯한 멍한 기분입니다.
앞으로는 주어진 상황과 현실에 좀더 냉정히 판단하고 행동하고자 합니다.
식민지 사관을 탈피하는 그 날까지.

미래에 제 자식이 학교를 가는날,,,
역사를 배우는 시간에 잘못된 역사에 대해 비판하고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이며 사실적인
내용을 알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일본은 지금도 독도는 자기땅이라며 우기고 난리를 하는데,
일제 치하 40년이라는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역사를 왜곡 시켰을지 헛웃음만 나오는군요.

또 한편으로는 어느 시대든 권력에 빌붙어 살아가는 자들이 있듯이 식민사관이 주는 달콤한 독약을 마치 특혜인 줄 알고 살아가는 한심하고도 미련한 동족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ssqt 08/06/28 [17:55]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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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qt 08/06/28 [17:57]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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