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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시조를 조작해서 족보를 만든 성씨

대한민국의 어느 성씨는 시조를 바꾸는 거짓족보를 만들었다

성씨연구가 | 기사입력 2012/11/18 [08:38]

오늘날 시조를 조작해서 족보를 만든 성씨

대한민국의 어느 성씨는 시조를 바꾸는 거짓족보를 만들었다
성씨연구가 | 입력 : 2012/11/18 [08:38]
[성씨(姓氏)는 자기의 뿌리이자 정체성이다. 특히 한민족은 태어나기 전부터 본성인 '가치·존엄·권리'를 하늘로부터 부여 받는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왜놈들에게 식민지배를 받으면서부터 또 특정종교의 민족문화전통풍습 등 대대로 이어져 온 모든 것에 대해 자신들의 종교와 배치된다면서 왜곡하고 말살하여 민족의 정체성은 물론 자신의 본성까지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
광복을 맞았지만 식민지배와 식민노예근성을 청산하지 못하고, 왜놈들에게 개돼지가 되어 아첨하고 아부하던 자들과 그 후손세력들이 정치·사회·경제·교육적으로, 종교적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우리 민족고유의 성씨까지 왜곡하여 말살하려고 한다. 이는 세계 역사상 남한만이 이 지경에 이르고 있다. 본지는 신문 최초로 잃어버린 성씨 되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바로 'ㄹ'성씨인데(참조: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3368&section=section58), 천만명이 넘는다. 영문화성씨<김씨는 킴씨로(KIM), 박씨는 팍씨로(PARK)>까지 합친다면 남한인구 5/4정도가 고유의 성씨를 잃어가고 있다. 
현재까지 자신의 뿌리인 성씨 되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신문은 본지가 유일무이하다.  개별적으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고유 성씨를 되찾고는 있지만, 현재로서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이는 개별적으로 성씨가 빼앗아간게 아니고 일시에 파괴한 것이기 때문에, 피해를 당하고 있는 성씨들이 뭉쳐 정부와 대국민을 상대로 호소 및 소송을 하여 일시에 되찾을 예정이다.  잃어버린 성씨 되찾기 운동에서 본지가 휴간한 관계로 주춤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년에는 본지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 성씨 되찾기에 동참하는 분을 중심으로 고유성씨도 되찾고 피해보상금도 받아낼 예정이다. 아래 글은 기고문으로서 독자 여러분들이 판단할 몫이기에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성씨되찾기=플러스코리아] 성씨연구가=
해당 성씨 사람들은 명백하게 이해하고 현혹되지 말아야하겠다. 한국 사람의 성(姓)은 천부(天賦)의 것이라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성씨(姓氏)로 자기의 정체성(正體性)을 확인하고, 그 성(姓)의 뿌리로 시조(始祖)는 어떤 분인가를 알고 자부심을 갖는다.

그래서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가장 윗대선조인 시조까지 이르게 되고, 뿌리가 된다,

자기 본래 시조의 출신(出身)을 다르게 말하면 시조를 모독(冒瀆)하는 것이고, 뿌리가 부정(否定)당하고 나를 모욕(侮辱)한 것이므로 가장 큰 치욕(恥辱)으로 여긴다. 즉, 나는 누구다 하는 근본(根本)이 짓밟히는 최고의 불명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어느 두 성씨가 천 년동안 시조로하던 사람을 아래로 끌어내리고 가공인물(가공인물)을 시조로 하여 두 문중이 합쳐 거짓족보를 만든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두 죽산 안씨(竹山 安氏)가 씨족 문중의 공식문서 죽산 안씨 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를 만들어 시조를 중국사람 이원(李瑗))이라는 가공인물의 아들이라고 역시 가공인물을 시조로 세웠다.

그러면서 한점 관련없는 광주(廣州). 순흥(順興) 안씨(安氏)를 같은 계통이라고 족보에 기록해 놓았다.

그러니 광주 안씨와 순흥 안씨는는 전혀 알지 못하던 시조의 아버지가 중국 사람이라니 중국에 뿌리를 둔 성씨가 되고, 중국의 귀화(歸化) 성씨가 되는 엄청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 사실을 깊게 고찰한 결과 전적으로 거짓으로 조작날조(造作捏造)한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자세히 말하면, 종래의 두 계통인 죽산 안씨(2개의 系統 竹山 安氏 )가 1976년(丙辰년)에, 중국의 롱서 이씨(隴西 李氏) 이원(李瑗)이라는 가공인물(架空人物)을 시조의 아버지로 꾸미고 그 아들 3형제가 성(姓)을 받고, 이름을 바꾸어 한국의 모든 안씨(安氏)들의 시조라고 족보를 만들더니,

불과 22년만인 1999년에 다시 족보를 만들면서 허구인물 이원이 중국 당나라(唐) 황제의 일가붙이라는 종실사람(宗室人)이라고 신분(身分)을 바꾸어 동쪽으로 와서 전공(戰功)으로 안씨(安氏) 성(姓)을 받았다고 하니 두 죽산 안씨가 하나로 합친 족보의 실상(實相)을 고증(考證)한다.

☆. 당나라 종실사람이란 당나라를 세운 唐 高祖 李淵의 일가붙이를 말한다.

특히, 전혀 관련이 없는(無關) 광주 안씨(廣州 安氏) 시조를 가공인물 이원의 둘째 아들이라고 끼워 붙이고,

시조이하 13대를 기록하고 순흥(順興) 안씨 시조를 붙여놓아 한국의 모든 안씨는 같은 뿌리라고 기록해 놓았다.

★. 고찰한 근거문헌.

가. 죽산 안씨 족보: 1976(丙辰)죽산안씨대동보. 1999(己卯)죽산안씨대동보.

1917(丁巳)죽산안씨세보. 1923(癸亥)죽산안씨세보.

나. 역사서: 삼국사기(신라본기). 고려사. 동사강목. 신당서. 자치통감.

다. 죽산안씨측 자료: 안씨원류(죽산안씨대종회.‘05.8.27.발행)

죽산안씨대종회보 7.8.10호(‘00.3월.’00.12월.‘05.5월)

죽산안씨측이 주장하는 고증자료(‘07.4.8.죽산안씨 대종회장 안국승씨 제공).

라. 성씨종합계보서: 씨족원류(조종운.1680년찬). 조선씨족통보(윤창현.1924년)

청구씨보. 만성대동보. 만가보. 한국족보대전. 성씨의 고향.

마. 백과류서(百科類書): 대동운부군옥(권문해.1589년찬). 증보문헌비고(1908).

1. 죽산 안씨 시조의 선계(先系)와 시조라는 인물은 날조(捏造)한 가공인물(架空人 物)이다.

가. 죽산 안씨 시조의 아버지(先系)라는 이원(李瑗)이 농서(隴西)이씨(李氏)로 당 나라(唐) 종실사람(宗 室人) 이국정(李國貞)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이국정의 아들은 이기(李錡). 이일(李鎰). 이풍기(李豊器). 이풍사(李豊士)로아들이 네 명이 있었는데,

이국정이 사사명(史思明)의 반란(叛亂)에 반군장수(叛軍將帥) 왕진(王振)에게 붙잡혀 당 보응 원년(唐 寶應元年.762)죽임을
당할 때 두 아들(풍기. 풍사) 도 같이 죽었다.

이국정의 큰 아들 이기(李錡)는 진해절도사(鎭海節度使)로 당 헌종(憲宗)황제에 항거한 죄로 원화2년( 807.丁亥). 11월 11일
에 당나라 도성(都城) 장안(長安) 흥안문(興安門) 성 밖에서 그의 아들 이사회(李師回)와 함께 허리를 꺾어 죽이는(腰斬)
처형을 당하였다. 이때 이기의 나이가 67세 때다.

이국정의 둘째 아들 이일(李鎰)은 이국정과 그 윗대 선조인 신통(淮安靖王 神通)이 당나라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므로
제사(祭祀)를 받들도록 용서를 받았다.

※.新唐書: 열전 제3.宗室. 열전 제149上. 叛臣 上. 자치통감: 唐紀53. 참조.

나. 죽산안씨대동보(1999년己卯)에 그 시조의 아버지(선계)가 이원(李瑗)이고 아우는 이황(李璜)인데 두 사람은 당나라 종실
사람 이국정의 아들이라 하는데 당나라 종실세계(宗室世系)에 없는 사람을 날조(捏造)한 것이다.

당나라 종실사람은 李錡. 李鎰이지, 李瑗. 李璜은 없는 사람이다.

※.신당서 卷70 上. 表제10上. 宗室世系 上. 참조.

다. 이황(李璜)은 고성 이씨(固城李氏)시조이고. 고려 덕종(1033). 문종(1063) 때 사람으로 당나라와는 전혀 관련이 사람이다.

※. 고려사 권5. 세가5. 고려사권8. 세가8. 고성 이씨 족보. 참조.

라. 이원이 당나라 종실사람도 아닐뿐더러 가공인물이니 그의 세 아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거짓이다.


2. 죽산 안씨 시조의 아버지가 동쪽으로 와서 전공(戰功)이 있고 安씨가 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다.

가. 이원. 이황이 당 헌종 원화2년(丁亥. 807)에 동쪽 우리나라에 와서 개성(開城) 송악산 아래에 살았다는데, 가공인물이 어떻게 올 수가 있는가? 807년에는 당나라 종실사람 이기가 처형을 받아 죽은 해다.

나. 이원과 이황이 광주(廣州)사람이 그 성주를 죽이는 민란이 일어난 것을 토평(討平)하는 전공(戰功)으로 신라 국왕(新羅 國王)이
이원에게 안씨(安氏) 성을 주고 이황은 이씨 성을 그대로 갖게 하고 고성군(固城君)으로 봉했다면서

그 근거로 신라 헌덕왕 7년(815)의 굶주린 백성이 도적이 된 지역의 반란진압을 인용하였는데, 반란지역은 서쪽 변두리 지역
이니 개성이나 광주(廣州)가 아닐뿐더러 이원이나 이황이 평정했다는 글자 한 자도 없다.

※.삼국사기(신라본기) 헌덕왕 7년 조 .참조.

다. 헌덕왕14년(822) 김헌창(金憲昌)의 반란기록을 이용하여 이원. 이황이 전공(戰功)이 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신라본기) 헌덕왕 14년 김헌창의 반란지역은 지금의 공주(公州) 지역을 중심으로 일으킨 반란이었고 당시 한산(漢山.
지금 광주 廣州)은 스스로 지켰고, 반란을 진압한 장수들의 인물기록 등이 자세하여 이원이나 이황은 글자 한 자도 없다.

※.삼국사기(신라본기)헌덕왕 14년 조. 참조.

라. 또, 헌덕왕 때에 백성에게 姓을 주었다는 기록과. 봉군(封君)한 사실이 삼국사기(신라 본기)에 없다.

3. 이원의 세 아들이 전공(戰功)이 있어 이름을 바꾸고(改名), 봉군(封君)받았다는 것도 거짓이다.

가. 신라 경문왕 4년(甲申.864) 갑신왜란(甲申倭亂)에 왜구를 소탕한 공으로 이원의 세 아들이라는 춘(枝春)은 방준(邦俊).
엽춘(葉春)은 방걸(邦傑). 화춘(花春)은 방협(邦俠)으로 이름을 바꾸고. 죽산군(竹山君). 광주군(廣 州君). 죽성군(竹城君)으로
봉군(封君)하였다는데.

신라 경문왕 4년에 왜란이 없으며, 경문왕 재위 14년 동안에도 왜란이 없었으며. 당시에 죽산. 광주. 죽성 이라는 지명(地名)이
없었고, 일반 백성에게 봉군하는 일이 없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경문왕 4년 조 내지 경문왕 조 전부. 참조.

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중국 당나라 종실사람이라는 이원이 없는 인물이니 그 자식이라는 세 사람도 허구인물인 것이다. (자식이 있을 수 없다)

다. 신라 때 성을 왕이 준(賜姓) 일은 신문왕 3년(683)에 보덕왕 안승(安勝) 에게 김씨(金씨)를 준 일. 애장왕 6년(805)에 왕의 어머니를 숙씨(叔씨)로 당 나라가 준 일. 이외에 는 없다.

라. 죽산 안씨가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을 빙자하면 1908년 당시에 떠돌던 항 간의 낭설(浪說)을 기록한 것일 뿐 삼국사기(신라본 기)에 없으니 거짓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마. 특히, 광주 안씨 시조 안방걸(安邦傑)의 출자(出自)와 성씨연원(姓氏淵源) 을 모방(模倣)하고 도용 (盜用)하여 황당무계(荒唐無稽)한 거짓족보(僞譜) 를 만든 것이다.

4. 종전(1976년 이전)에는 두 죽산 안씨는 어떤 족보기록을 가졌는가?

가. 죽산을 본관으로 하는 안씨는 준(濬. 또는 漢平). 영의(令儀)를 시조로 한 두 죽산 안씨 문중이 있 고,

이들 두 죽산 안씨는 1744년. 1805년에 각각 족보를 간행하며, 분명하게 각각(各各) 계대(繼代) 를 이어왔음이 그들의 족보 기록과 각종 성씨계보 문헌에 확실하다.

※.죽산안씨세보(1917.1923.). 씨족원류. 대동운부군옥. 청구씨보. 만성대동보. 만가보. 참조.

준계(濬系)와 영의계(令儀系)인 두 죽산 안씨의 1930년대 이전 후손 의 비문(碑文). 행장(行狀). 시장(諡狀)등에 기록한 기록을 고찰한 결과.

나. 영조 20년(甲子.1744)에 준계(濬)인 죽산 안씨가 처음으로 족보를 편찬하면서 씨족원류(氏族源流. 조종운이 1680년에 필사
편찬한 綜合姓氏譜)를 보고 해당 계파를 베껴서 참고 하였다는 안상휘 (安相徽)의 족보서문(序文) 과.

순조 5년(乙丑.1805)에 처음으로 간행한 영의계(令儀)의 죽산 안씨는 안성흠(安聖欽)이 쓴 족보 서문(序文)에서 시조와 계대(系代)가 모호(模糊)하다는 고충(苦衷)을 기록하고 있다.

다. 두 죽산 안씨 문중이 항간에 떠돌던『농서이씨동래설(隴西李氏東來說)』이나『죽산안씨 同源譜』 라는 허황(虛荒)한 설(說)
을 두 문중이 1919년 이후 일제강점 하에서 이용하고,

족보에 또 다른 가공인물인 안윤채 가록(安潤彩 家錄)이라 하면서 범례(凡 例). 또는 별록(別錄) 으로 기록하면서 “믿지 못한다 (尙難徵信)“라고 스스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두 죽산 안씨 족보에 안윤채(安潤彩)가 자손으로 기록이 없는 가공인물이다.

라. 또, 두 문중은 고려이후 조선조에는 이름난 선조가 있고, 그 개인의 행적 을 보아도 중국 사람이나 당나라 종실사람과 한 점 관련이 없다.

마. 고려. 조선조 때의 전통사회에서 죽산 안씨. 광주 안씨. 순흥 안씨 간에 서로 결혼(結婚)으로 얽혀 있음을 보면 성씨만 같을 뿐 다른 계통임이 분명한 것이다.

5. 맺는 말

가. 두 죽산 안씨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도 그 근원(根源)이 불명애매(不明曖昧)한 궁색(窮色)을 피하려는 수단으로 가공인물을 만들어 1976년에 두 죽산 안씨가 족보를 합쳐 [대동보]라고 조작 하고, 불과 22년만인 1999년에 다시 시조의 격(格)을 높여? 조작하여 사람들을 현혹한 것으로 볼 수 밖 에 없다.

나. 또 조작한 족보에 광주 안씨와 순흥 안씨의 시조. 선조들을 같은 계통으로 기록하였으니 죽산 안씨는 성씨의 공식문서인 족보로써 다른 안씨의 姓氏根本을 侵犯하여 다른 성씨를 모욕 하는 중대한 범죄(重大犯罪)를 저지른 것이다.

다. 다른 안씨들은 1980년 이후에 간행된 각종 종합성씨계보서적에 한국의 안씨가 "하나의 계통 으로 기록된 것은 바로『농서이씨동래설』이나 죽산 안씨 족보기록을 이용한 것이니,절대로 현혹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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