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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는 누구인가] 북 "신채호, 민족사학에 진보적 역할"

평생을 민족사학 정립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단재 신채호 선생

소산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2/04 [12:07]

[단재는 누구인가] 북 "신채호, 민족사학에 진보적 역할"

평생을 민족사학 정립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단재 신채호 선생

소산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02/04 [12:07]

 

 

 

북녘의 학술 계간지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申采浩) 선생의 논설 '독사신론(讀史新論)'에 대해 민족주의적 사학 형성에 "진보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북의 '역사과학' 최근호(2007년 12월호)는 신채호 선생이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을 소개하는 글을 싣고 "독사신론에 반영된 신채호의 역사관이 우리나라 민족주의 사학 형성과 편사 사학에 미친 진보적 역할은 근대시기 역사학이 종전의 유교적 명분론에 기초한 중세 편사 사학의 틀에서 벗어나 근대적 학문에로의 첫 걸음을 떼게 하는 데 적지않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이 학술지는 "종전에 우리 학계에서는 우리 인민들의 반일애국 정신을 계발시키기 위한 애국문화 운동가들의 역사저술 활동으로서의 신채호의 역사저술들을 일부 간단하게 취급했을 뿐, 그의 역사관에 대해, 그리고 민족주의 사학 형성에서 차지하는 지위 등이 깊이있게 연구되지 못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학술지는 독사신론에 반영된 신채호 선생의 역사관의 특징으로 "조선민족을 조선역사 시술의 기둥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 "단군을 종전의 신화적 인물로서가 아니라 근대역사 인식에 따른 실재한 인물로 보려한 것",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이 왜나라(일본)에 미친 정치, 경제, 문화 분야에서의 선진적 영향을 새롭게 밝힌 것" 등을 꼽았다.

학술지는 특히 신채호 선생이 독사신론에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에 대해서도 회의적 입장을 표시"했으며, "발해사를 되살려 우리 민족사의 응당한 위치에서 논해야 한다고 언급"하는 등 "역사서술의 대상을 그 어떤 개인이나 왕이 아니라 조선 민족으로 설정하고 편사학을 민족의 자강을 실현하기 위한 학문으로 하기 위한 시도"를 벌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독사신론에 반영된 신채호의 역사관은 일정한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고 역사과학은 지적하고, 그 예로 독사신론이 "삼국통일론을 비롯해 종래의 사대주의 사관에 기초한 온갖 허황한 설들에 대한 불철저한 비판 태도"를 보였다고 들었다.

또 "사론적 형식의 글인 것으로 인해 많은 경우 충분한 역사적 근거가 없이 단언에 그치고 추상적인 결론에 머무른 것"도 독사신론이 가진 한계라고 역사과학은 덧붙였다. 

 


[자료]민족주의 사학의 선구자. 문학가. 언론인. 교육자 - 단재 신채호 

 

[관련 영상자료]단재 신채호 선생 국적 회복시키기 운동

일제하 민족주의자들의 1921년 이승만의 미국위임 통치 청원을 규탄하며

아(我) 이천만 형제자매에게 향하여 이승만·정한경 등 대미위임통치청원 및 매국·매족의 청원을 제출한 사실을 거하여 그 죄를 성토하노라.

이등의 해청원제출을 곧 4252년 3월경 아국 독립운동 발발의 동시하여 세계의 대전이 종결되자 평화회의가 개설되며, 따라서 민족자결의 성낭(聲浪)이 높았도다. 이에 각 민족이 자유대로

⑴ 고유의 독립을 잃은 민족은 다시 그 독립을 회복하며,

⑵ 갑국의 소유로 을국에 빼앗기었던 토지는 다시 갑국으로 돌리며,

⑶ 양강국간 피차 쟁탈되는 지방은 그 지방 거민의 의사에 의하여 통치의 주권을 자택하게 하며,

⑷ 오직 덕(德)·오(奧)·토(土)의 각 식민지는 그 주국이 난수(亂首)의 책벌로 이를 몰수하여 협약국에 위탁통치한 배 되었도다.

이상 1,2,3항 및 민족자결문제에 의하여 구주내 수십개 신독립국과 신변경한 기개지방이 있는 이외에 실행되지 못한 곳이 더 많거니와 당초에는 각 강국들도 다 그와 같이 떠들었으며 허다 망국민족들은 이와 같이 되기를 빌었도다.오천년 독립의 고국으로 무리한 만국(蠻國)의 병탄을 받아, 십년 혈전을 계속하여 온, 우리 조선도 이 사조에 응하여 더욱 분발할새, 내지는 물론이요 중령의 조선인도 독립을 부르며, 아령의 조선인도 독립을 부르며, 미령의 조선인도 독립을 부르며, 일본 동경의 조선유학생도 독립을 부를새, 더욱 미령의 동포들은 국민회의 주동으로 각처 향응하여 노동소득의 혈한전(血汗錢)을 거두어 평화회의에 조선독립문제를 제출하기 위하여 대표를 뽑아 파려(巴黎)에 보낼새, 이와 정 등이 그 뽑힌 바 되어 발정하다가 여행권의 난득(難得)으로 중로에서 체유할새, 피등이 합병 십년 일인의 식민지된 통한을 잊었던가, 독립을 위하여, 검에, 총에, 악형에 죽은 선충선열이 계심을 몰랐던가, 조선을 자래 독립국이 아닌줄로 생각하였던가. 거연(遽然)히 위임통치청원서 및 조선의 미국식민지 되어지이다, 하는 요구를 미국정부에 제출하여 매국·매족의 행위를 감행하였도다.

 

독립이란 금에서 일보를 물러서면 합병 적괴(賊魁)의 이완용이 되거나, 정합방론자의 송병준이 되거나, 자치운동의 민원식이 되어, 화국(禍國)의 요얼(妖얼)이 병작하리니, 독립의 대방을 위하여, 이·정 등을 주토치 아니할 수 없으며, 방관자의 안중에는 조선이 이미 멸망하였다 할지라도 조선인의 심중에는 영원독립의 조선이 있어, 일본뿐 아니라 곧 세계 하국을 물론하고 우리 조선에 향하여 무례를 가하거든 검으로나 총으로나 아니면 적수공권으로라도 혈전함이 조선민족의 정신이니, 만일 이 정신이 없이 친일자는 일본에, 친미자는 미국에, 친영자나 친아자는 영국이나 아국에 노예됨을 원한다 하면, 조선민족은 생생세세 노예의 일도에 윤회되리니, 독립의 정신을 위하여 이·정 등을 주토아니 할 수 없으며, 우리 전도는 전국 이천만의 요구가 '독립뿐'이란 혈과 누의 규호로 내론 동포의 성력을 단합하며, 외론 열국의 동정을 박득함에 재하거늘, 이제 위임통치의 사론을 용허하면 기로를 열어 동포를 미혹케 할 뿐 아니라, 또 골계모순(滑稽矛盾)으로써 외국인에게 보이어 조선민족의 진의가 어데 있는가를 회의케 하리니 독립운동의 전도를 위하여 이·정 등을 주토 아니할 수 없도다.

위임통치청원에 대하여 재미 국민회 중앙 총회장 안창호는 동의든지 묵인이든지 해회의 주간자로서 이·정 등을 대표로 보내어 해청원을 올리었으니, 그 죄책도 또한 용서할 수 없으며, 상해의정원이 소위 임시정부를 조직할 때에, 앞서 전파된 위임통치청원 운운의 설을 이 등과 사감있는 자의 주출(做出)이라 하여 철저히 사핵하지 않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정함도 천만의 경거어니와 제2차 소위 각원을 개조할 때에는 환하게 해청원의 제출이 사실임을 알았는데, 마침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거한 죄는 더 중대하며, 특파대사 김규식이 구주로부터 돌아와 '조선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어찌하여 위임통치청원자 이승만을 대통령에 임하였느냐.'하는 각 국인사의 반문에 아무 회답할 말이 없었다 하여, 만방에 등소(騰笑)된 실상을 전하거늘 그래도 이는 존재하였다 하여 그 범죄의 탄핵은 없으며, 그 청원의 취소시킬 의사도 없이, 오직 옹호의 책획함에 열중하는 의정원이나 각원이란 모모들의 민원식과 같이 철저한 주장이 아니고 다만 시(時의) 미오(迷誤)인 고로 이도 지금에는 이 일을 옳은 줄로 자처함이 아니니 구태어 추죄할 것이 없다 하나, 그럴진대 피등이 즉시 미국정부에 향하여, 그 청원의 취소를 성명하고 국인에게 향하여 망작의 죄를 사하여서 만분의 일이라도 자속(自贖)의 도를 구함이 가하거늘, 이제 십수의 지점을 불원하고 엄연히 상해에 래하여 소위 대통령의 각의로 오히려 여론을 농락하려 하니 이는 화심을 포장한 역적이 아니면 구차용녹(苟且庸碌)의 비부(鄙夫)라, 역적이나 비부를 가차(假借)하여 국민의 명예를 오욕하면 또한 가통하지 아니한가.

당초에는 해청원이 제출 여부·접수 여부가 모두 모호암매에 중에 있으므로 본인 등도 의려만 포할 뿐이요, 진하여 주토의 거를 신치 못하였더니, 오늘 와서는 사실의 전부가 폭로되어 우리 국민이라고는 용인하지 못하겠도다.자에제일 이 등에 죄상을 선포하여 후래자를 위하여 경징의 의를 소화(昭華)하며, 제이 미국정부에 향하여 이천만을 대표하였다 운함은 이승만·정한경 등은 무자이니, 해청원은 곧 이승만·정한경 등 일, 이개인의 자작이요 우리 국민의 여지할 배 아니라 하여, 그 청원의 무효됨을 성명하기로 결의하고 우의 성토문을 발하여 원근의 동성으로 전도의 공제(共濟)를 바라노라.

기원 사천 이백 오십 사년 사월 십구일

강경문, 고광인, 기운, 김주병, 김세준, 김재희, 김원봉, 김창숙, 김맹여, 김대호, 김갑, 김세상, 김병식, 김탁, 김창근, 김자언, 남공선, 도경, 이대근, 이성파, 이극로, 이강준, 이춘, 이기○, 임대주, 박건병, 박용옥, 박기중, 방한태, 배달무, 매환, 서백양, 서백보, 손학해, 송호, 신채호, 신달모, 안여반, 오기찬, 오성윤, 윤대제, 장원갱, 장건상, 전홍승, 정인교, 조준, 조진원, 조정, 송철, 최용덕, 최묵, 최윤명, 하학, 한흥  


단재 신채호 일대기

 단재 신채호는 언론, 역사, 독립운동, 교육, 문학 등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 활동을 전개한 선각자로 근대 인물 가운데 지조와 의리를 소중하게 여긴 마지막 선비였다.


1905년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위원으로 시작하여, 1906년 항일언론에 앞장섰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기자로 봉직하고, 해외에서는 1911년 러시아 불라디보스톡에서 '대양보(大洋報)'의 주필로, 이어서 12년에 나온 '권업신문(勸業新聞)'과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대립한 '신대한(新大韓)'의 주필로 활약한 언론인이었다. 한 평생을 병고와 가난으로 지냈지만 항상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고 대의를 위하여 싸워 나간 큰 학자였다. 1936년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 이후 단재의 이론과 학설에 대한 평가가 시작되어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단재 학설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연구가 홍기문(洪起文:괴산 출생으로 벽초 홍명희의 장남)이 조선일보 1936년 2월 29일치에서부터 8회에 걸쳐 연재된 "조선역사학(朝鮮歷史學)의 선구자(先驅者)인 신단재학설(申丹齋學說)의 비판(批判)"이 있다. 이 보다 조금 늦게 안재홍(安在鴻)이 쓴 "조선사학(朝鮮史學)의 선구자(先驅者)-신단재학설(申丹齋學說) 사관(私觀)"이란 논문이 '조광(朝光)' 잡지1936년 4월호에 게재됨으로써 단재 학설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후 중국의 침략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단재학 연구는 활발하지 못하였다. 해방이후 상해에서는 이석증(李石曾), 양가락(楊家駱), 주설(朱設) 등 중국인들과 유자명(柳子明) 등 동지가 중심이 되어 신채호학사(申采浩學社)가 설립되고 중문과 영문으로 유문집 간행을 계획하였으나 실행에 옮겨 지지는 못하였다.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자 남한과 북한은 각기 신채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불행하게도 남한에서는 임시정부에서 단재와 정적(政敵) 관계에 있었던 이승만이 대통령이 됨으로 해서 그가 집권하던 기간에는 연구와 추모 사업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북한에서는 신채호를 부르주아적 애국계몽가이며 역사가로 평가하면서 그에 관한 연구논문이 발표되었다. 1962년 '역사과학'이란 학술지에 장국종이 집필한 '사대주의적 력사관을 반대하여 투쟁한 계몽사가 신채호' 가 대표적인 논문 중의 하나이다. 북한에는 단재가 중국에서 집필한 여러 가지 친필 유고가 남아 있고, 1960년대에는 문학작품 등 일부가 인쇄 출판된 바 있었다. 대량의 친필 유고는 현재 평양 인민대학습원에 소장되어 있으나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일본에 있어서의 단재연구는 한국사를 전공한 카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 교수가 관심을 갖고 여러 편의 논문을 남겼다. 아쉽게도 1992년 53세의 나이로 타계하자 나카오 미치코(中尾美知子) 등 그의 제자들이 단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였고 '조선상고사'의 번역본도 내는 여러 가지 업적이 나왔다. 중국에서는 연변대학의 金柄珉교수가 김일성대학에서 단재의 문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단재문학유고선' 등의 저술이 있으며, 그 밖에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단재의 사론(史論)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단재 신채호에 관한 연구의 업적은 무수하게 많이 나타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체계적인 분류나 분석이 되어 있지 않다. 연구 논문 목록이나 단행본 목록 등이 수집되어 이에 대한 해제 등이 정리되는 것도 단재연구의 체계화를 위하여 요청된다고 하겠다. 당시 단재선생의 부모는 논마지기는 고사하고 밭조차 버젓한 것이 없었으니, 산간밭을 개간하여 보리와 콩, 옥수수 농사를 지어 허기를 메우는 지경이었다. 그것도 보릿고개에는 남아있는 식량이 거의 없어 산나물을 캐어 죽을 쑤어 먹어야했다.

단재의 할머니 외가가 있는 도리미 마을은 부근의 두 부락과 함께 어남리를 이루고 있는데, 계족산 봉우리들이 이어지는 사이의 삼태기 같은 깊은 골짜기에 군데군데 집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봉소골이라고도 불리웠는데 이것은 새둥지 같은 깊은 산 속에 삼태기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외딴 곳에 떨어진 마을의 전체 형편은 모두 비슷하였다.가난한 살림속에 성장한 터라 단재는 몸이 매우 허약하였으며, 병약하여 마음대로 활동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할머니의 외가가 있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태어난 단재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중에서도 단재에게 가장 커다란 고통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 신광식을 잃는 슬픔이었다. 항상 자신과 자신의 형 재호에게 큰 힘이 되어주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은 단재에게 큰 불행이었다.


신광식은 고향인 충북 청원군 낭성면 추정리 가래울 대왕산 후미진 곳에 묻혔다. 그리고 남은 식구들도 일가 친척들이 많이 모여살고 있는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돌아왔다.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할아버지 신성우는 마을에서 서당을 열고 글을 가르치며 한편으로는 두 손주에게 본격적으로 한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단재선생의 재능은 이때부터 발휘하기 시작하였는데, 아홉 살에 중국역사인 '통감'을 통달하였고, 이후 삼국지와 수호지 등을 거침없이 읽어나갔다.단재선생은 열살무렵 한시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써레와 쟁기를 지고 나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이 한시를 지었다. 

朝出負而氏 論去地多起 '이른 아침에 써래와 쟁기를 지고 들로 나가세. 논을 갈아 나가니 흙덩이가 많이도 일어나네.'

연날리기를 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한시를 지었다.  

高低風强弱 遠近絲長短 '높게 혹은 낮게 날림은 바람의 세고 약함에 있고 멀리 혹은 가까이 날림은 실의 길고 짧음에 있구나.

이렇게 점차 학문의 정도가 성숙하게 되어가던 즈음에 단재선생에게는 또 하나의 슬픔이 닥쳐왔다. 항상 아버지처럼 단재선생을 따뜻하게 보살펴주던 형 재호가 단재의 나이 13세때 세상을 뜬 것이다.

16세가 되던 해에 단재는 주위의 권유에 의하여 풍양조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혼인을 한다.

17세에는 진사를 지낸 신승구의 집에서, 19세에는 목천의 신기선의 사저를 드나들면서 한학을 익힌 단재는 드디어 신기선의 추천으로 19세에 성균관에 입교하게 된다.성균관에 입교한 단재는 이종원, 이남규 아래에서 수학을 하며 훗날 이름을 날리는 변영만, 김연성, 유인식, 조용은 등과 교유하게 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령신씨로, 시조는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고 검교와 군기감의 벼슬을 지낸 신성용이다. 그 윗사람들은 신라의 공족(公族)으로 여러대에 걸쳐 고령에 살면서 호장(戶長)을 지내 왔기 때문에 고령신씨로 계승되어 왔다.단재는 시조로부터는 26세 손이 되고, 조선조에 영의정까지 지낸 신숙주에게는 18대 손이 된다.

고령신씨의 일부는 연산군 무렵에 낭성과 가덕 지방에 낙향하여 상당산 동쪽에 살았으므로 산동대가로서 지칭되어왔으며, 낭성서 대과급제 24명, 진사 80여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그러나, 단재의 직계는 높은 벼슬과는 인연이 멀었다. 그의 16대조부터 12대조까지는 종 3품에서 종 6품에 이르는 벼슬에 있었으나 11대조부터 9대조까지는 족보상에조차 벼슬이 보이지 않으며, 8대조부터 6대조까지는 일시 벼슬이 주어지는 것 같다가 5대조부터는 다시 그 증직되는 벼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몰락하였다. 단지 조부 신성우가 문과에 합격하여 사간원의 정언의 벼슬을 거치고 있을 뿐이다.


단재 집안의 몰락에는 이인좌의 난과 관련되어있다. 이 난의 관계자중 신천영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단재의 직계는 아니고, 신숙주의 5대손인 신식의 5대손이라고 한다. 신식의 외손에 소현세자가 있는데 신식의 5대손인 신천영은 이인좌와 모의하여 반란을 꾀하고는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을 추대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신식의 가문은 거의 몰락하였다. 그리고 이 여파는 낭성 일대에 미쳐, 단재의 5대조 신두모 등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급속하게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원군의 집정기간동안 단재의 할아버지인 신성우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정 6품 벼슬인 정언을 지냈을 뿐이다.신성우의 벼슬길 이후에도 단재의 집안은 피지 못하여 그의 낙향과 함께 집안사정은 극심한 생활난에 허덕이게 되었다.할 수 없이 신성우는 처가가 있는 안동권씨 마을로 외동아들인 신광식을 보내어 외가살이를 시키게 된다.

단재의 아버지 신광식은 가난한 시골 선비로, 본래 살던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을 떠나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 마을 외가댁 옆에 간신히 묘막을 얻어 살아야 할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외가인 권씨촌 도리미에서 신광식은 부인 밀양박씨와의 사이에서 첫 아들 신재호를 낳았고, 서른 두 살이 되어서는 둘째아들 신채호(申寀浩) 낳았다. 이 이름은 나중에 채호(采浩)로 고쳐지는데 이 사람이 단재신채호선생이다. 선생의 아호 단재는 최영 장군의 단심가에서 따온 것이다.형인 재호는 순흥안씨와의 사이에 향란이라는 딸을 두었는데, 단재 나이 13세때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단재는 중국망명시기 향란의 결혼문제와 관련하여 국내로 들어왔다가 혈연의 정을 끊기도 한다. 단재는 16세가 되던 해에 집안에서 정해준 풍양조씨와 결혼을 하여 첫아들 관일을 낳았으나 우유에 체해 아들을 잃고 난 후 부인과 이혼을 한다.

 

중국망명 중이던 1920년 단재는 박자혜와 두 번째 결혼을 하여 그 사이에 수범과 두범 두 아들을 낳는다. 박자혜는 1895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현 서울 도봉구 수유리 화계유치원자리)에서 태어나 1914년 숙명여학교 기예과(2회)를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조선총독부 부속병원(현 적십자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소위 '간우회사건'을 주동한 인물이었다. 당시 박자혜는 북경 연변대학에 재학중이었는데 단재와의 결혼은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성사되었다. 박자혜는 연경대학에서 여대생 축구팀을 구성하여 주장으로 활약할 만큼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1936년 단재가 여순감옥에서 서거한 이후 둘째 아들 두범은 1942년 영양실조로 사망하였고, 1944년 박자혜도 병사한다.장남 수범은 단재의 국적취득을 위하여 노력하여 1986년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케 하였으며, 단재의 업적을 정리하는 작업에 온힘을 기울이다 1991년 5월 사망하였다.


독립협회가 서울에서 개최한 만민공동회가 절정을 이루던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한다. 당시 단재는 내무부 문서부 소속으로 일하였는데, 이 부서에는 이상재, 신흥우, 김규식 등이 함께 있었다. 독립협회의 운동이 힘차게 진행될수록 정부의 탄압도 심해져 결국에는 여러사람들과 함께 단재도 검거되어 투옥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다행히 신기선의 후원으로 석방은 되었지만 처음 경험한 독립협회의 운동은 단재에게 오랫동안 성균관에서 공부하게끔 하지 않았다. 1901년 단재는 고향 근처 인차리에 신규식, 신백우와 함께 문동학교를 세워 젊은 청년들을 교육하여 나갔다.1904년 고향에 있던 단재는 이하영 등이 황무지개간권을 일본에 팔아먹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성균관으로 다시 올라와 항일성토문을 작성하고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항일성토궐기를 한다.

1905년에는 성균관 합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박사를 받았지만, 곧 고향으로 다시 내려와 계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황성신문'의 발행에 참여하던 장지연의 권유로 황성신문 논설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황성신문에서의 단재 필치는 예리하고 강렬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한데 모았고, 이후 언론인으로서의 단재활동을 가늠케하였다. 1905년 을사5조약을 비난하는 장지연의 그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이 황성신문에 인쇄되고 난 뒤 황성신문은 무기 정간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단재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초빙한 사람은 그 신문의 총무를 맡고 있던 양기탁이었다.


'대한매일신보'에서도 단재의 글들은 사회의 중요한 이야기 거리였다. 그 옛날 나라를 구했던 영웅들을 다시 살려내 현재의 나라를 구하려 하였던 단재는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최도통전'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 모두는 서두에서부터 풍전등화와 같았던 나라의 운명을 건져보려는 단재의 소망이 한껏 들어간 명문들이었다. 역사가로서, 문학가로서 다방면에 걸친 단재의 재능이 돋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단재는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 '천희당시화', '소설가의 추세' 등을 발표하여 여러 분야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단재는 1910년 1월 6일자 신문에 '한일 합방론자들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마지막으로 하여 국내에서의 활동을 접고 안창호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한다.

1910년 봄 신민회 간부들은 일제의 점점 심해지는 책동에 대하여 대응책을 논의하는 비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신민회는 어려워진 국내에서의 독립활동을 접고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구체적 사업으로는 서북간도를 비롯한 시베리아, 미주 등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나아가 이들 지역에 동포들을 이주시켜 항일의 근거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1910년 4월 8일 단재는 일단 국내를 빠져나가 중국 청도에서 만나자는 계획에 따라 안정복의 '동사강목'만을 들고 김지간과 국경을 넘어 신민회 회의가 열리는 청도로 갔다. 향후 독립운동의 방향을 결정할 중대한 회의였던 청도회의는 독립운동에 대한 점진론과 급진론이 대두된 회의였고, 따라서 여러 대안이 치열하게 맞선 회의였다.


일주일동안 진행된 청도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길림성 밀산현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모든 독립운동의 기지를 이 곳에 두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종호의 출자금과 여러 각처의 성금을 통하여 농토도 마련하고, 무관학교도 세우려던 이들의 노력은 이종호의 포기로 결국 실패하고 망명인사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단재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다.이 곳 블라디보스톡에서 단재는 '해조신문', '청구신문', '권업신문', '대양보' 등의 발행에 참여하면서 항일운동을 계속해나갔다.

단재의 몸을 돌보지 않는 활발한 활동은 단재의 쇠약을 가져왔고, 이러한 단재를 보다 못해 상해의 신규식이 단재를 불러들였다. 대충 몸의 기력을 회복한 단재는 신규식이 운영하던 동제사에서 잠시 머물면서, 신규식의 도움으로 박달학원을 개설하고 청년들을 가르쳤다. 박달학원은 단군의 얼을 살려 민족의 살 길을 찾아보려는 단재의 의식으로부터 시작한 교육기관이었다. 이 학원의 강사로는 문일평, 홍명희, 조소앙, 신규식 등이 초빙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1914년 단재는 중국 망명 중 역사의식의 대전환을 맞는 기회를 갖게 된다. 윤세용·윤세복 형제의 초청으로 그들이 창설한 동창학교(東昌學校) 운영에 참여하기 위하여 환인현으로 갔던 것인데, 윤세복·신백우·김사·이길룡 등과 함께 백두산을 거쳐 만주를 돌아가는 대 여행을 가졌던 것이다. 백두산과 광개토대왕릉 등의 여행은 이후 단재에게 대고구려적인 사고를 갖게하는 귀중한 경험을 준다. 단재가 구상하던 고대사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시작되고 구체화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이후 단재는 이상설·신규식·박은식·유동열·조성환·성낙형·이춘일 등과 함께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지만, 이 조직의 활동이 실효성이 없음을 알고 역사연구와 문학적인 창작에 몰두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1916년 봄에 단재는 북경에서 중편소설 『꿈하늘』을 탈고하는데, 이 작품은 단재가 한놈의 입과 손을 빌어 나라의 독립운동전개를 상징적 수법으로 극화한 대표적 소설이다.

단재는 이 기간동안 대종교(大倧敎)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는데, 대종교의 제1대 교주 나철이 구월산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긴글을 남기고 자결하자 그 비통한 심사를 「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을 지어 바치며 달랬다. 그후 단재는 제2대 교주 김교헌과도 함께 대종교 교육에 참여하였으며, 이 일에는 유근·박은식 등이 함께 하였다. 후일 단재의 「조선상고사」는 대종교의 교본이 되기도 한다.아끼던 제자 김기수의 죽음과 조카 향란의 혼인 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돌아온 단재는 그후 북경의 보타암에 기거하며 역사연구에 매진하였다. 이때 벽초 홍명희는 남양군도에서 삼년간 방랑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였는데, 단재의 숙소를 자주들르며 평생동안의 남다른 우정을 나누게 된다.

한편, 임시정부의 수립에도 적극 참여하였던 단재는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추대되자 위임통치를 미국에 건의한 경력을 들어 이에 반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단재의 뜻과는 반대로 일이 성사되자 단재는 임정을 나와 임정을 비판하는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한다. 또한, 임정이 발행하던 '독립신문'에 맞서 '신대한'을 창간하고 임정의 잘못된 노선을 비판하는 소위 '신대한사건'을 주동하게 된다.

1918년 12월 만주 동삼성(東三省)에서 활동하던 중광단(重光團)이 중심이 되어 국외의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보통 '무오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이 독립선언에 단재도 주요 인물로 참여하였다. 이 선언서는 무력투쟁이 유일한 독립운동임을 선언하여 2·8독립선언이나 3·1독립선언과는 내용적으로 달랐다.

1919년부터는 국내에서 발생한 3·1운동의 여파로 중국에 망명해있던 독립 운동가들이 상해에 모여 통합된 임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단재는 임시의정원중 한사람으로 참여하면서 한성정부의 법통을 주장하였다. 논의가 계속되는 동안 임시정부의 초대 수반으로 이승만이 거론되자 단재는 그가 '없는 나라마저 팔아먹어,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 나쁘다'며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단재의 뜻과는 달리 의정원회의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자 단재는 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을 사임하고 임시정부내의 준비론과 외교론에 대한 성토에 나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단재는 대동 청년단(大同靑年黨)을 재건하여 그 단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고, 대한 독립청년단 단장, 신대한 동맹단(新大韓同盟團) 부단주로 활발한 활동을 펴는 한편, 프랑스 조계 의영학교(義英學校) 교장이 되어 청년교육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와 맞섰던 신대한 사건을 계기로 상해 임정과 결별한 단재는 북경으로 돌아와 항일운동에 매진한다. 보합단(普合團) 조직에 참여하여 내임장(內任長)으로 추대되어 활동하는가 하면 독립운동의 행동대였던 '다물단'(多勿團)의 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다물단은 우당 이회영의 조카인 이규준이 몇몇 동지들과 만든 무장독립운동단체로 다물은 조국의 광복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 단재는 이 다물단의 조직과 선언문을 작성에 도움을 주었다.그리고, 1922년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에 고문으로 가입한 단재는 의열단 선언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한다.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인 폭력투쟁으로 일관하는 의열단은 단재의 운동정신에도 부합하는 단체여서 단재는 흔쾌히 6천 4백여자에 이르는 이 선언서를 작성하게 된다.



단재는 조국 독립운동의 결실을 민중혁명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하고, 1924년 북경에서 처음 결성된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의 기관지인 '정의공보'에 논설을 실으면서 무정부주의 운동에 관심을 나타냈다.이후 단재가 관여하였던 통일전선체 신간회 운동이 무산되자 단재는 더욱 무정부주의 운동으로 경도된다. 1927년 남경에서 수립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하였으며, 무정부주의 기관지인 '탈환', '동방' 등의 잡지에도 관여하며 적지 않은 글을 기고하였다.

1928년 4월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의 베이징 동방연맹대회부터 단재는 본격적으로 이 무정부주의 혁명운동에 참여한다.

1920년 재혼한 부인 박자혜와 아들 수범을 불러 얼굴을 본 단재는 무정부주의 운동의 본격적인 활동을 위하여 공작금 마련을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된다. 결국 택한 방법은 외국 위조지폐를 만들어 이를 폭탄 제조소 설치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단재는 중국인 유병택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서 이 위폐를 교환하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대만 기륭항에서 체포된다. 2년 동안의 재판을 통하여 단재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죄수번호 411번을 달고 여순감옥에 수감된다.


형기를 3년 정도 앞두고 병이 악화된 단재는 결국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 순국한다. 순국이전에 병보석으로 감옥문을 나설 기회가 있었지만,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단재는 거부하였던 것이다.일제로부터 우리 민족이 압박과 설움을 받던 시기동안, 수 많은 애국지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살다 갔다. 그러나, 단재선생처럼 이론과 실천면에서 투철했던 지사는 드물었으며 특히, 일제와의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몸소 실천하다 끝내 감옥에서 순국한 선열은 더욱 드물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학자였지만, 언론인으로 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사관은 그가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그의 초창기 사관은 소수의 영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영웅주의사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고, 따라서 고대문화를 폭 넓게 이해하게 되면서 영웅주의 사관을 극복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에는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혁명을 주도하여 항일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폭력적 항일운동과 무정부주의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단재는 한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에서 사관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그가 국사의 연구와 교육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국사의 연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민족의 자강과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의 민족주의 사관은 민족의 자강과 독립이라는 사상적 바탕위에서 성립된 것이었다. 이와같이 그의 사학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지만, 민중을 주체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유교적인 전근대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근대사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죽으면 나의 시체를 왜놈들이 밟지 못하도록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 달라고 했던 단재 신채호. 하지만 그의 유골 한줌은 고국 청주의 고령 신씨 고두미 마을로 돌아왔고 호적이 없던 그의 유택은 뜰 한켠에 마련되었으니, 그의 혼백은 지금도 편안하지 못할 것만 같다. 그의 일생은 붕정만리(鵬程萬里)의 고단한 삶으로 점철되어 있다. 큰 뜻의 날개를 저어서 민족을 위한 역사의 바다를 떠다니시던 선생님. 죽어서도 구천의 넋으로 역사의 바다를 떠돌 것만 같은데 그의 문장을, 혹은 문학작품을 분석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새로운 회의가 밀려든다.

단재는 민족문학의 맥을 잇는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그는 한학에 능통하여 고전 전적(典籍)을 막힘없이 읽고 비판하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의 문학 영역은 한시, 시조, 근대시, 전(傳), 역사소설 등 다방면에 걸쳐 있는 바, 바로 이 점은 단재가 문학의 형식을 다만 문장(文章) 또는 문(文)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단재문학에 대하여 요약하여 보면, 첫째, 단재 문학의 의의는 삶과 죽음의 절대주의 즉 일원론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단재가 흔히 알려진 것과 같이 문학의 대 사회적 효용성만을 중요시했던 것은 아니고 문학으로서 갖추어야 할 여러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훌륭한 문장들을 생산한 문인으로서도 중요하다.


둘째, 단재는 양반 계층 출신이면서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섰다는 데 있다. 단재는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라는 복고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민족 해방을 위한 진보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 점은 되짚어 강조되어 마땅하다. 하지만 단재는 전통적인 문학관 즉 문이재도(文以載道)의 일원론적 입장을 견지했다. '文은 氣이고 道는 理다'라는 조선후기 유가들이 가지고 있던 문학관을 일원론으로 이해하면서 비타협적 절대주의 문학관을 고수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사안이다.

셋째, 단재가 '조선혁명선언'에서 주창한 민중의 직접 혁명은 '용과 용의 대격전', '꿈하늘'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민중의 직접혁명을 주장한 단재는 식민지적 현실을 적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민중적 세계관 속에서 담아내고 있다. 이 당시의 민중은 식민지 조선인 모두를 상징한다. 그의 혁명적 일원론은 서구문학에 대한 민족문학의 항거였고 문예반정(文藝反正)이었던 것이다.

넷째, 단재의 작품을 소설이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라는 루카치(Lukac's)적 관점에서가 아닌, 우리 나라 전통의 문학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논자는 ① 이광수 - 염상섭 - 이기영 - 이상 - 김승옥으로 이어지는 흐름과는 다른, ② 신채호 - 홍명희 - 황석영 - 김지하 - 이문구로 이어지는 흐름을 생각해 보았다. 잠정적으로 ① 을 이광수적 축, ② 를 신채호적 축으로 명명해 둔다. 물경스런 가설로 보일 수도 있는 두 흐름은 그러나, 크고 깊은 한국문학의 강속에 녹아 있는 하나의 물줄기로 합쳐져 있음은 당연한 것인 만큼 단재의 문학사적 의의는 크다. '이식문화론과 전통단절론은 이론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는 해묵은 과제의 실마리를 단재류의 역사전기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서구 소설의 영향보다도 고전소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음이 확인되었다.


다섯째, 단재의 민족주의 정신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자칫 국수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국수주의와 영웅 사관에 대한 맹목적 찬양은 단재의 문학과 사상을 훼손할 염려가 있다. 단재는 절대주의적 관점에서 살고 썼고 죽었지만 지금 우리는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논하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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