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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15. 서울에서 평양으로 선물을 보내다

김련희 북녘동포 | 기사입력 2016/11/25 [11:49]

[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15. 서울에서 평양으로 선물을 보내다

김련희 북녘동포 | 입력 : 2016/11/25 [11:49]

 

▲ 아람 판 사진 작가가 평양에서 가져온 심장 모양의 돌에 정성스럽게 편지를 써서 다시 평양에 보내는 김련희 동포여성     ©



10월 22일 통일부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고 통일부장관 면담을 요청하였더니 11월 24일 에야 날짜가 잡혔는데 통일부장관은 바쁘다며 나오지 않아서 통일부정착과장과 면회가 이루어졌다.

 

양심수후원회 고문회장이신 권오헌 회장, 변호사와 함께 3명이서 통일부에 들어가니 3명은 안 되고 2명만 면회할 수 있다며 끝까지 승인을 해주지 않아 변호사님은 들어가지 못하고 권오헌 회장과 함께 정착과장을 만나게 되었다.

 

정착과장은 우리와 만난 자리에서 ‘김련희씨를 돌려보낼 수 없다는 정부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며 ‘여기 남쪽에서 정착하겠다면 생활조건을 최대한 보장해주겠다’고 말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럼 과장님은 누가 몇억원을 준다면 그 돈에 부모, 자식을 팔수는 있는가요?”라고 반문했다.

 

가족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 어떤 물질적 유혹이나 육체적 고통이 온다고 과연 천륜을 끊어버릴 수 있을까? 우리는 고향으로의 송환을 강력히 요구한다며 통일부의 인도주의 방침을 바란다고 말하고는 나와 버렸다. 통일 부정문을 나서는데 통일뉴스 기자가 인터뷰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는 통일부에 ‘김련희를 왜 못 보내는가?’라고 질의해보니 통일부 대변인이 하는 말이 “김련희를 보내면 북이 체제선전에 이용해먹을까봐 보내지 못하며, 또한 김련희를 판문점을 거쳐 북으로 보내는 선례를 낳게 되면 여기 남쪽에 있는 2만여 명의 탈북자들이 서로 가겠다고 하면 막을 수가 없다”라며 나를 보낼 수 없는 이유를 밝혔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참으로 허무해 지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다.
평범한 한 아줌마인 나 하나를 보내 북에서 체제선전에 쓰인다고 한들 그렇게도 당당하지 못할까. 그리도 떳떳하지 못할끼. 뭐가 그리 두려울까, 북에서 나 하나로 체제선전을 한다고 이 남쪽이 흔들거릴 만큼 그리도 자신감이 없는 것일까,

 

여기 남쪽에서는 많은 탈북자들을 TV나 강연을 내보내 북에 대해 갖은 거짓과 사기로 오늘날 북의 현실을 가리고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유엔이나 국제무대에 탈북자들을 내세워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북의 인권을 날조하다가 국제 망신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 정부가 북을 붕괴시키고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오랜 기간 탈북자들을 대대적인 체제선전에 이용하고 있지만 북이 한 치라도 흔들렸는가!
통일부의 이러한 구차한 하소연보다는 차라리 현행법이 없어 보낼 수 없다는 변명이 한결 듣기가 편할 것 같다. 나는 이번 면담을 통해 통일부는 허울뿐인 껍데기이고 아무것도 판단할 수도, 결정할 수도 없는 기구, 그 어떤 기대나 미련을 가질 곳이 전혀 못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날 한겨례신문 허재현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2015년 7월 4일 나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담아 세상에 처음으로 나의 사연을 알렸던 기자의 기사가 국제엠네스티 언론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정말 너무나 기뻤다. ‘아, 세상이 정의와 양심은 나를 버리지 않는구나, 나의 고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허 기자는 12월 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국제엠네스티 언론상 시상식이 있는데 나도 참가하면 좋겠다고 했다. 언론인들의 모임이라 자못 긴장되었지만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허 기자와 함께 시상식에 참가하였다.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는 해마다 세계인권의 날인 12월 10일을 기념하여 국제엠네스티 언론상을 시상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제18회 국제엠네스티 언론상에는 모두 57편이 응모했고 그중 7편의 수상작과 1편의 특별상에 대해 시상했다

 

시상식에서는 “김련희이야기는 북한이탈주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채 강제로 남한 국적을 부여하는 심각한 인권침해 행위를 고발했고 보도 이후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평하였다.

 

허재현 기자는 연단에서 상패를 수여받고 나서 세계인권선언 13조 2항에 보면 ‘모든 사람들은 나라를 떠날 수 있고 고국으로 돌아갈 권리를 갖고 있다’라고 되어 있으며 그 정신에 입각해 보도를 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용기 있는 고백을 해주어서 이 보도를 가능하게 해 준 주인공 김련희 씨에게 자신의 수상 소감을 대신하겠다며 나를 연단으로 불러주었다.

 

나는 많은 기자들이 지켜보는 긴장감 속에 말을 이었다.

 

“먼저 한겨례 허재현기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분단비극의 희생자로, 나 하나만의 아픔으로 누구도 모르게 묻혀 버릴 수 있었던 사연을 정치적 압박을 무릅쓰고 있는 그대로, 이 세상에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내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4년 전만 해도 저도 여러분들과 똑같이 남편과 딸과 단란한 가정생활을 하던 아낙네였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저희 부모님과 남편, 사랑하는 딸과 생이별하고 이렇게 남녘땅에 억류되어 있습니다.
저는 달리 바라는 것 없어요. 사상, 체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북녘 땅에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게시고 제 피붙이 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아프신 몸으로 죽기 전에 딸의 얼굴 한번만 보고 싶다고 하시고, 제 딸을 4년 동안 오지 않는 야속한 엄마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나요?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자고 합니까? 여러분도 부모와 지식과 남편이 있잖아요. 저도 부모님이 보고 싶고 딸도 안아보고 싶어요. 아무리 북과 남이 분단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같이 해야 할 동포잖아요. 언론인들이 많이 도와주시고 제가 부모님과 자식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주세요”하고 언론인들에게 호소하였다.

 

이렇게 점차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던 때에 또다시 나를 설레게 한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 싱가폴 아람 판 사진작가가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촬영한 영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북의 가족들  

 

싱가폴의 사진기자가 평양에 가서 나의 딸을 만나 동영상을 제작하여 유튜브에 올린 것이다. 평양을 취재하는 싱가포르 사진작가 아람 판 선생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북송을 요구하는 탈북여성 김련희(45)씨가 북에 두고 온 딸과 연락하는 것을 돕겠다고 밝혔다. 아람 판 선생은 11월 29일 오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헤어진 가족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고 위로하고자 리련금(북한 거주)씨와 그의 어머니 김련희 씨를 연결(connect)하는 일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2015년 11월 싱가포르 사진작가 아람 판(Aram Pan) 씨는 국제 사회에 나의 북송을 호소하는 동영상을 들고 평양을 방문하여 나의 딸에게 보여준 후 딸이 어머니께 보내는 영상 메시지를 담아 인터넷에 공개했다

 

평양 개선문 부근에서 촬영한 이 영상에서 나의 딸은 엄마의 동영상을 보자마자 눈물을 쏟아내었다. 지난 11월 21일이 어머니 생일이었다며 혈육 하나 없는 한국에서 생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걱정하면서 다가오는 새해에도 분열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가족의 불행을 토로하며 눈물을 멈추지 못한다.

 

그러면서 딸을 그리워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해 꼭 건강한 모습을 유지해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또한 CNN 기자나 재미동포 신은미 씨, 또 이번 아람 판 씨와 세계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인사들, 그리고 한국의 동포들에게 우리 가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겨준 데 감사의 인사도 전했다.

 

▲ 어머니에 대해 관심을 가져준 CNN, 아람 판, 신은미 씨 등 양심적인 국제 인사들과 남녘 동포들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김련희 씨의 딸 리연금 학생     © 자주시보

 

나는 딸의 동영상을 보며 2달 전 눈물만을 쏟던 모습과는 달리 엄마의 건강을 걱정하고 엄마를 곁에서 지켜주고 응원해주시는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의젓하고 대견한 딸의 모습을 보니 나의 마음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남녘에서 4년만에 두 번째로 보는 딸의 모습이라 안쓰럽고 가슴이 아프면서도 반갑고 기뻤다.

 

 

그러던 어느 날 아람 판 선생으로부터 나에게 연락이 왔다. 12월 말에 평양을 방문하게 되는데 한국에 와서 나를 인터뷰하여 평양의 딸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전화가 끝났는데도 나는 꿈만 같고 너무 기뻐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었다. 가슴이 활랑거리고 하염없이 눈물만 흐른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평양에서 우리 딸을 만나주셨던 그 기자님이 여기 나를 만나려 오신다니...”

 

나는 며칠을 고민 끝에 평양에 계시는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시장에 가서 겨울 목도리 4개를 사온 나는 집에서 하루 종일 수를 놓았다. 아버지, 어머니, 남편, 딸의 목도리에 한뜸한뜸 정성껏 수를 놓으며 추운 겨울 이 목도리를 하고 따스한 엄마의 손길을 느끼며 좋아할 딸의 웃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안겨왔다.

 

12월 18일 아람 판 선생이 내가 머물고 있는 서울 낙성대 ‘만남의 집’으로 찾아오셨다. 동영상에서 나의 딸과 함께 계시던 기자선생이 차에서 내리시는데 저도 모르게 달려가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다. 꼭 딸을 만나는 것처럼 반가웠다.

 

서로 손을 꼭 잡고 차에서 내려 집안으로 들어가는 그 짧은 시간의 감정은 뭐라 형언할 수가 없다. 방에 들어선 기자선생은 거실에서 나와 마주앉자 품속에서 작은 돌을 하나 꺼내주며 말하였다.

 

“북에서 가져온 평양의 돌이예요”

 

나는 그 돌을 흐르는 눈물로 적시며 가슴에 꼭 안았다. “아 이 얼마나 소중한 내 고향의 돌인가. 얼마나 만져보고 싶었던 평양의 돌인가.”

 

아람 판 선생은 평양에 가서 찍은 딸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사람이 일생 얼마큼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걸가? 4년 세월 하루같이 쏟아 낸 눈물이 그 얼마인데 아직도 주책없는 이 눈물은 끊이지 않고 계속 흐른다. 자다가도 울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린아이들을 보면 또 울고, 밥술을 뜨다가 울고 전화를 하다가 울고, 누군가 딸이라는 말만 꺼내도 울고 저녘에 잠자리에 들면 또 울고, 맛나는 거 먹을 때도 울고 힘들고 지쳐도 울고, 비가 내려도 울고 눈이 내려도 울고, 단풍을 보며 울고 낙엽이 머리를 스쳐도 울컥하고,...

 

엄마의 동영상을 보며 눈물을 쏟는 딸의 모습을 보느라니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지게 아프다. 기자 선생이 가족에게 영상편지를 보내라고 한다. 나는 부모님에게만을 절대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간신히 눈물을 머금고 가족에게 이야기했다.

 

“아버지, 어머니, 건강하시죠? 많이 춥죠?
너무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해드려 정말 미안해요.
어머니 칠순잔치에 제가 갈수는 없지만 이렇게 영상으로나마 인사를 드릴 수 있어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이 딸을 꼭 믿어주세요.
저는 달리는 살수 없는 아버지, 어머니의 딸이니까요.
여보, 미안해. 그동안 당신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해 정말 미안해.
이제 돌아가면 지금까지 당신에게 미안했던 것 다 갚을께
딸, 정말 보고 싶고 또 보고 싶다.
엄마가 부탁이 있어. 부디 밥 잘 먹고 건강해서 밝은 모습으로 지냈으면 좋겠어.
네가 울면 엄마는 더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러니 항상 웃으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잘 지내길 바랄게. 딸 사랑한다.“

 

나는 아람 판 씨가 준 평양의 돌을 한참을 쓸어보다가 그 돌에 글을 적어 다시 평양으로 보내기로 결심했다. 한 면에는 “김련희”  다른 면에는 “보고싶어요, 사랑해요”라고 글을 써서 아람 판씨에게 드렸다. 그리고 수를 놓아 미리 준비했던 목도리도 전달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야속한지 기자님과 헤어질 순간이 닥쳐왔다. 기자님을 바래려 문밖으로 나가는데 또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과 칼로 허비는 아픔을 견딜 수가 없었다.
기자님은 헤어지기 전에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며 내 눈앞에서 멀어지더니 영영 보이지 않는다.

 

▲ 어머니가 서울에서 보내준 돌 편지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는 수를 놓아 보낸 목도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통곡하는 김련희 씨의 딸 리연금 씨, 남편도 기어이 흐르는 눈물을 견디지 못했다.     © 자주시보

 

그제서야 나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엉엉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트렸다.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내려친다, 숨이 쉬여지지 않는다. 너무나도 힘들다.
‘아 저분은 며칠 후면 나의 딸을 만나겠지. 딸의 손을 잡아볼 수 있겠지. 딸을 안아줄 수 있겠지. 그 머나먼 싱가폴 기자도 평양에 가서 나의 딸을 만날 수 있는데 지척인 여기서 나는 왜 딸을 만날 수 없을까. 딸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앞으로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아람 판 씨는 그길로 중국을 거쳐 평양으로 갔다.

 

 

며칠 후 유튜브에 아람 판 씨가 평양에서 남편과 딸을 만나 나의 동영상과 서울에서 평양으로 보낸 나의 선물을 딸에게 전달하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딸은 엄마의 영상을 보며 너무나 아프게 울고 또 운다. 엄마가 한뜸한뜸 정성껏 수를 놓은 목도리를 가슴에 안고 안타깝게 눈물을 쏟는다. 남편은 눈물을 닦아내며 기자에게 묻는다.


“련금이 엄마 건강은 괜찮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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