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의 진실]몽골과 미대륙 사이에 '요동반도'가 있었다현 요동반도는 대조선COREA의 사서들의 기록과 맞지 않다[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김종문] 1700년 이전에 제작됐다는 영문고지도들의 대부분은 MONGAL(몽골, 蒙古)을 Bering Strait(베링해협)서쪽 北海(북해)인근 현대의 Sakha Republic(사하공화국)에 일관되게 명시 했으며 蒙古(몽골)과 韓半島(한반도, 미대륙)사이에는 거대한 遼東半島(요동반도)가 있었다.
遼東半島(요동반도)의 북쪽 머나먼 사막에서 남쪽으로 흘러오던 通州江(통주강)은 17세기초 배 없이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얕았으나, 淸國(청나라)가 얕은 여울 50여 곳을 파낸 후 18세기에는 COREA의 臨津江(임진강)처럼 커다란 강으로 변했다. 강바닥을 아무리 파내도 물이 없는 사막의 얕은 강이 커다란 배가 다닐 수 있는 큰 강이 될 수는 없으며 淸國(청나라)가 通州江(통주강)의 수원을 가까운 北海(북해)와 연결하였기에 임진강처럼 크고 유속이 빠를 수 있었던 것이다. 遼東半島(요동반도)의 사막들은 天下(천하)의 航路(항로)라 불렸던 通州江(통주강)의 강한 물살에 침식되어 벌어져 IESSO Strait가 생겼고 백수십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급격하게 침식되어 Bering Sea(베링해)가 되었다. 그러나 근세기 대조선COREA의 역사가 조작되며 韓半島(한반도, 미대륙)는 현재의 韓半島(한반도)인 朝鮮半島(조선반도)로 이동되었으며 遼東半島(요동반도)도 함께 이동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요동반도는 역사기록들과 불일치하게 된 것이다.
遼東半島(요동반도)의 地理的(지리적) 특징은 沙漠(사막)이 있었다는 것과 요택(遼澤)이라는 거대한 늪지대를 들 수 있다. 여러 역사기록들에 北京(북경)에서 鴨綠江(압록강)까지 沙漠(사막)들이 있었으며 萬里長城(만리장성)의 동쪽관문인 山海關(산해관)을 출발해서 遼水(요수)를 건너기 전 遼澤(요택)이라 불리는 2백리의 늪지대를 통과해야 한다고 하였다. 서기 645년 당 태종 이세민(唐 太宗 李世民)은 遼澤(요택)을 통해 高句麗(고구려)를 침공했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제3하 을사년 신라 선덕여주 14년, 고구려 왕장 4년, 백제 왕 의자 5년(당 태종 정관 19, 645). 중략...황제가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성(遼東城)을 함락했다. 이세적이 전진하여 요동성 밑에 이르렀고 경오(庚午)에 황제가 요택(遼澤)에 이르렀는데 진흙 수렁길이 2백여 리라 인마(人馬)가 통할 수 없으므로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펴고 다리를 놓아 군사들이 쉬지 않고 행군하여 임신(壬申)에 요택 동쪽을 건넜다. …중략… 정축(丁丑)에, 황제가 요수(遼水)를 건너와서 다리를 철거하여 사졸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주둔하고서 제장(諸將)을 위로하고 장군예를 목베어 죽였다… (高句麗(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당태종은 遼水(요수)를 건너고 요택(遼澤)을 지나서 도망갔다.) 중략…을유일(乙酉日)에 요동에 이르고 병술일(丙戌日)에 요수를 건너니 요택(遼澤)이 진흙탕이어서 거마(車馬)가 통할 수가 없으므로,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에는 수레로써 다리를 만드는데, 황제가 친히 나무를 말채찍에 매어 역사(役事)를 도왔다... 萬里長城(만리장성)의 동쪽 관문인 山海關(산해관)에서 遼水(요수)를 건너 遼東(요동)으로 오려면 2백리의 늪지대인 遼澤(요택)을 통과해야 했었으나 18세기말에는 山海關(산해관)에서 瀋陽(심양)까지 8백리의 바닷가 진흙벌판이 있었다고 한다. 정조 19권, 9년(1785 을사/ 청 건륭(乾隆) 50년) 4월 19일(무술) 6번째기사. "… 신이 돌아오는 길에 산해관(山海關)에서부터 심양(瀋陽)에 이르기까지 8백리 였는데, 끝없이 바라보이는 바닷가 진흙 벌판에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토인(土人)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2월 보름경에 큰 눈이 사흘 동안 내려, 산해관 밖의 40여 주(州)에 나누어서 기르던 관마(官馬)들이 일시에 얼어 죽었는데, 그 숫자가 7천여 필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 臣於歸路, 自山海關至瀋陽八百里, 一望泥海, 行旅幾絶, 怪問土人, 則以爲: “二月望間大雪三日, 官馬之分養於關外四十餘州者, 一時駢 至七千餘匹。” 云。 遼東半島(요동반도)는 사막지대여서 온난한 기후였으나 18세기 초 通州江(통주강)으로 내려오는 차가운 北海(북해)에 의해 침식되어 Bering Sea(베링해)가 생기면서 18세기 말의 山海關(산해관)과 瀋陽(심양)의 중간은 2백리의 늪지대인 遼澤(요택)이 변하여 8백리의 갯벌이 생기고 기후가 차가워져 산해관 밖에 기르던 말 7 천여필이 일시에 얼어 죽은 것이며 요동은 말이없으면 다니기 힘든 황무지였기에 인적이 끊긴 것이다.
현재 萬里長城(만리장성) 山海關(산해관)과 瀋陽(심양) 사이에 갯벌은 보이지 않으며 18세기말 원래의 요동이 있었던 알래스카 서쪽지역에는 거대한 갯벌들이 남아 있다.
Alaska(알래스카)서쪽山海關(산해관)과 瀋陽(심양)지역 사이에는 현재도 여러 곳에 커다란 진흙 벌판인 갯벌들이 있으며 해수면이 현재보다 낮았을 18세기에는 현재보다 거대한 갯벌이 있었을 것이다.
국역일성록 > 정조4년 경자(1780,건륭 45) > 7월12일(무자). 중략... “사신(使臣)이 지금 요동(遼東) 벌판을 지나고 있겠는가?” 하니, 정민시가 아뢰기를, “도강(渡江)한 날짜를 계산해 보니, 요동 벌판을 지나고 있을 듯합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요동 벌판은 땅이 몹시 질펀하여 이렇게 빗물이 고여 있을 때에는 사람과 말이 다리가 빠져 걸을 수가 없다고 하던데, 그러한가?” 하니, 정민시가 아뢰기를, “역설배(譯舌輩)의 말을 들으니, 요동 벌판은 땅이 움푹 파여 물이 고여 있기 때문에 장맛비가 내리는 때가 아니더라도 행인(行人)들이 지나가기가 아주 어렵다고 하니, 이렇게 장맛비가 내리는 때에는 더욱 걷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使臣今則似過遼野乎民始曰計其渡江日字則似過遼野矣予曰遼野甚泥濘當此潦水之時則人馬沒脚不得作行云然否民始曰聞譯舌輩言遼野污陷故雖非潦雨時行人之過去甚難云若當此潦雨則㔫難作行矣...
정조4년 淸國(청나라)로 가는 사신을 걱정하시는 정조대왕께서는 遼東(요동)벌판에 물웅덩이가 많다고 걱정을 하셨으나, 현재 대한민국의 韓半島(한반도) 鴨綠江(압록강)에서 遼東半島(요동반도) 사이에는 물웅덩이들이 모여있어 통행이 어려운 지역이 없다. 즉, 그러한 지역은 원래의 요동인 현재의 Alaska(알래스카)서쪽에 있다.
Alaska(알래스카) 서쪽은 18세기의 遼東(요동)으로 매우 넓은 지역이 물웅덩이지역이며 확대해보면 수미터에서 수십키로미터의 호수들과 물웅덩이들이 있다. 遼東半島(요동반도)는 지워졌다. 영문고지도들 중에는 遼東半島(요동반도)의 침식과 대륙의 분리를 감추기 위하여 미대륙을 아시아와 분리시키고 Bering Strait(베링해협)과 Bering Sea(베링해)를 실제보다 커다랗게 표시한 지도들이 많다.
영문고지도들 중에 1570년 Abraham Ortelius의 지도들 이후에 제작됐다는 지도들의 대부분은 몽골과 미대륙 사이의 요동반도를 아예 지워 바다로 그렸다.
1700년 이전에 제작됐다는 영문고지도들의 대부분은 MONGAL(몽골, 蒙古)을 北海(북해)인근에 Sakha Republic(사하공화국)에 표시했으며 몽골과 COREA의 韓半島(한반도, 미대륙)는 사이에 거대한 遼東半島(요동반도)는 17세기후반 이후 Bering Strait(베링해협)의 바닷물에 깎여 Bering Sea(베링해)가 되었고, 남겨진 알래스카의 遼東(요동)벌판은 수심이 낮은 바닷가 갯벌과 육지의 물웅덩이지역이 되었다. 현재의 遼東半島(요동반도)는 대조선COREA의 여러 사서들의 기록과 맞지 않다. MONGAL(몽골, 蒙古)과 COREA의 韓半島(한반도)를 현 위치로 이동시키면서 만들어진 조작지명인 것이다.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영문고지도들을 공부하다 우연히 고지도들의 중요지명들이 이동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후 현재의 중요지명들의 위치가 세계사조작을 위하여 이동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2년여간 지명이동사례들을 탐구하여 정리하였습니다. 2014년 7월부터 고지도조작의 사례들을 모은 ‘고지도의 진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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