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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우리 땅, '녹둔도'는 사할린?

1860년 러시아와 청나라의 북경조약으로 인해 넘어간 우리의 땅

김민수 역사칼럼 | 기사입력 2013/08/09 [14:03]

잃어버린 우리 땅, '녹둔도'는 사할린?

1860년 러시아와 청나라의 북경조약으로 인해 넘어간 우리의 땅

김민수 역사칼럼 | 입력 : 2013/08/09 [14:03]
[민족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김민수= 북해(北海:함경도와 북간도 사이의 바다)의 녹둔도(鹿屯島)는 함경북도 선봉군(先鋒郡) 조산리(造山里)에서 약 4㎞ 거리에 있는 섬이며, 둘레는 약 8㎞이고 조선국이 둔전(屯田)을 경작하였다. 
 
▲ 압록강은 현 요하, 두만강은 현 아무르강, 백두산은 현 핑딩산, 녹둔도는 현 사할린.  왜 녹둔도가 사할린 인가는 아래 관련 기사 참조.   © 편집부

1448년 8월 27일 의정부(議政府)에서 병조(兵曹)의 하급 관아에서 상급 관아에 올리는 보고서 첩정(牒呈)에 의거하여 상신하기를, “병선(兵船)은 국가의 도둑을 막는 기구이므로 배를 짓는 소나무를 사사로이 베지 못하도록 이미 일찍이 입법을 하였는데 무식한 무리들이 가만히 서로 작벌(斫伐)하여 혹은 사사로이 배를 짓고, 혹은 집 재목을 만들어 소나무가 거의 없어졌으니 실로 염려됩니다. 지금 연해(沿海) 주현(州縣)의 여러 섬과 각 곶(串)의 소나무가 잘되는 땅을 방문하여 장부에 기록하였는데 함길도(咸吉道) 경흥부(慶興府)의 녹둔도(鹿屯島)에 전부터 소나무가 있는 곳에는 나무하는 것을 엄금(嚴禁)하고 나무가 없는 곳에는 관원을 보내어 심게 하고 만호(萬戶)로 하여금 감독 관리하고 배양하여 용도가 있을 때에 대비하게 하소서.”하니,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1455년 8월 10일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 都節制使) 양정(楊汀)과 도사(都事) 강효문(康孝文) 등이 새로 임명된 관리가 부임에 앞서 임금께 인사를 드리는 사조(辭朝)하니 세조가 사정전(思政殿)에서 인견(引見)하고, 강효문에게 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가죽을 여러 장 모아 이어서 만든 갖옷 호구(狐裘) 1령(領)과 모관(毛冠)·귀마개 이엄(耳掩)· 활과 화살 궁전(弓箭) 등의 물건을 하사하고, 드디어 사목(事目)을 양정에게 주었는데 “골간옥적합(骨看兀狄哈) 속에서 숙위(宿衛)에 충당할 만한 자를 가려 뽑아서 올려보내고 압록강(鴨綠江), 북해(北海) 연안의 군사적인 요충지(要衝地) 조산 구자(造山 口子)·녹둔도(鹿屯島)의 농민들이 들에 흩어져 있을 때 골간(骨看) 등이 배를 타고 몰래 들어와 약탈(掠奪)할까 염려되니 은밀히 진장(鎭將) 및 만호(萬戶)에게 유시(諭示)하여 그 방어를 엄히 더하도록 하라”하였다.

1510년 3월 5일 좌의정 류순정(柳順汀)이 아뢰기를,“신이 들으니, 함흥(咸興)에 입거(入居)한 1백 호에게는 경작할 땅이 없다 합니다. 녹둔도(鹿屯島)가 비옥(肥沃)하여 경작할 만한데 송일(宋軼)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후일의 도둑이 일으키는 난리 적변(賊變)이 두려우니, 경작을 허가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듣건대 녹둔도는 적의 길은 물이 깊어 왕래하기 어렵고 우리나라 사람이 가서 경작하는 길은 북해(北海) 물이 얕아 다니기가 쉽다 합니다. 조산보 만호(造山堡 萬戶)로 하여금 그 곳으로 보(堡)를 이설(移設)하게 하여 경작 수확할 때에 수호하면 적이 요격할 수 없고 백성은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경종(耕種)할 수 있습니다. 관찰사 고형산(高荊山)이 그곳의 험하고 평탄함을 자세히 아니 청컨대 고형산(高荊山)에게 깨달아 알아듣도록 일러주는 효유(曉諭)하여 조산보를 옮기는 이해와 경종할 때에 수호하는 편리 여부를 심사하여 치계(馳啓)하게 함이 어떠합니까?”하니, 중종이 그대로 따랐다.

▲ '지방지도'(地方地圖)의 '경흥지도'(慶興地圖·1872)에 나온 녹둔도(빨간 점선 안 왼쪽 아래). | 서울대 출판문화원 제공     © 편집부

1542년 5월 21일 지평(持平) 임형수(林亨秀)가 아뢰기를 ‘경흥 본진(本鎭)에 강제로 입거(入居)시켰던 사람들을 조산보(造山堡)에 많이 들여보냈었는데 땅은 좁고 사람은 많으므로 조정이 의논하여 녹둔도(鹿屯島)에 들어가는 것을 허가하였다. 이제는 입거한 사람이 죄다 유망(流亡)하고 겨우 열 집이 있는데도 녹둔도에 가서 경작한다. 봄에 농사지을 때가 되면 만호(萬戶)가 군민(軍民)을 거느리고 조산보(造山堡)를 비우고 녹둔도에 가서 성과 기계를 만들다가 가을이 되면 조산보(造山堡)로 돌아오는데, 갈 때와 돌아올 때에 모두 가산(家産)을 나르므로 이 때문에 백성에게 일정한 재산 항산(恒産)이 없어서 거의 다 유망하였다. 만호 등이 왕래하지 않으려 하나 감사(監司)에게 의심받을까 하여 마지 못해서 한다.’는 것입니다. 신이 보건대, 이쪽에도 개간하지 않은 황지(荒地)가 많고 또한 죄다 개간하지 못하는데 여전히 북해(北海)를 건너 녹둔도로 넘어가서 경작하므로 백성들이 지탱하지 못하니, 지극히 온편하지 못합니다.”하니, 중종이 이르기를, “북도(北道:함경도)의 폐단을 조정이 함께 의논하여 선처하도록 하라.”하였다.

1583년 12월 1일 경흥(慶興)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경작하였는데 이는 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건의를 따른 것으로 부사(府使) 원호(元豪)가 주관하였다. 녹둔도는 북해(北海:함경도와 북간도 사이의 바다) 북쪽 언덕과 가까워 사람들과 말이 통행하였으며 방책(防柵)을 설치하고 이졸(吏卒) 약간 명을 두어 방수(防戍)케 하였으나 수비가 매우 약하여 지방 사람들이 걱정하였다.1587년 10월 4일 병조 판서 정언신(鄭彦信)이 아뢰기를,“녹둔도(鹿屯島)에 논밭을 일군 일은 전부 신에게서 발의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오랑캐들이 침범해 와 사람과 가축들을 약탈해 갔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이는 모두 신의 그릇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일입니다. 먼저 신을 다스려 조정과 백성 조야(朝野)에 사과하소서.”하니, 선조가 전교하기를, “녹둔도는 오랑캐들이 침입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로서 처음부터 이 같은 일이 생기리라는 것을 우려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녹둔도(鹿屯島)는 조종조 때부터 우리의 농장이었는데, 경이 군량이 어려운 형편에 놓인 것을 목도하고 백성들을 들여보내 농사를 짓도록 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잘못인가. 설사 차질을 빚었다고 하더라도 지혜로운 사람도 많은 생각 중에 반드시 한 번은 실수하는 법이니, 경이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하는 충성에야 어찌 손상됨이 있겠는가. 내 어떻게 경에게 허물을 주어 국사를 돌보지 않고서 방관하는 자들의 웃음거리로 만들어 주겠는가. 부디 이것 때문에 스스로 위축되지 말고 알면서도 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하였다. 10월 10일 경성(鏡城)의 북병영(北兵營)에 두었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인 북병사(北兵使)가 치계하였다. “오랑캐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 만호(造山 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 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죄인을 잡아 가두는 수금(囚禁)하였습니다.”

11월 21일 선조가 명령을 적어 승지(承旨)에게 전하던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녹둔도(鹿屯島)에서 포로가 된 군민(軍民)이 모두 1백 60여 인이다.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몸은 예의(禮義)의 나라에서 태어났으나 저 오랑캐의 노예가 되었으니 그 원통함을 이루 말할 수 없도다. 옛 현군(賢君)들은 죽은 병졸의 유해(遺骸)도 오히려 비단을 풀어 수습하였었다. 지금 변방 오랑캐들에게 포로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여 대가를 지불하고, 외국에 있는 동포를 데리고 돌아오는 쇄환(刷還)할 때 2명 이상을 쇄환하는 사람의 경우는 상경시켜 많은 상(賞)으로 포창해 주려는 것이 불가할 것은 없다. 다만 간사하고 교활한 간교(奸巧)한 오랑캐는 그 변화무쌍한 속임수가 갖가지이므로 평상시에는 저들 뜻대로 잡아갔다가 스스로 쇄환하면서 겉으로는 정성을 바치는 듯이 하고 속으로는 후한 상을 바란다. 때문에 우리나라 변방 백성들을 가지고 일생의 뜻밖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 기화(奇貨)로 삼으니 상이 후할수록 약탈은 늘어갈 것이다. 이는 마치 물결을 일으키며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고 섶나무를 더 쌓으며 불을 끄려는 것과 같은 짓이다. 아마도 그들의 오만하고 모멸하는 뜻은 이리 같은 마음에 근본한 것일 터이니 그 쇄환하는 것이 어찌 즐겨 성심으로 순종하고 충성을 다해서 하는 것이겠는가.

지금 만일 새로운 예를 만들어 여진족(女眞族)을 해마다 정례적으로 일정한 인원을 한성(漢城)으로 상경(上京)시키는 별운(別運)하는 일을 더 마련한다면 만족할 줄 모르는 저 무리들은 외면으로는 순종하되 내심은 거역하면서 아침에 약탈했다가 저녁에는 되돌려 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술수에 떨어져 결국 앉아서 그 속임수와 수모를 받을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옳다고 하겠는가. 만약에 녹둔도의 포로를 쇄환하는 자들만 상경(上京)시키도록 정한다면 뜻밖의 간교한 속임수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다른 포로들도 똑같은 동포인데 이들만 버려두고 외면하는 것은 왕정(王政)의 체모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지만 반복해 생각해 보아도 옳은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새로운 법규를 만들지 않는 것이 더욱 좋다고 여기는데, 정원의 생각은 어떠한가?”하였다. 회계(回啓)하기를, “신들은 오랑캐를 별운(別運)시킨다는 공사(公事)를 보고서 이는 온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지금 임금의 교지(敎旨) 성교(聖敎)를 받드니 감히 다시 한 마디 말도 더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이 군사의 기밀에 관계된 것이니 비변사로 하여금 다시 헤아려 생각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위성으로 본 잃어버린 북방영토. 왼쪽은 산해관 이동으로 부터 오른쪽은 사할린까지로 현 요하와 아무르강 이남이다.     © 편집부

12월 26일 북병영(北兵營)에 두었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인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이 치계하였는데, 대개는 녹둔도(鹿屯島)가 함락되었다는 일이었다. 선조가 전교하기를,“이 서장(書狀)을 보니, 너무도 참혹스럽고 통분하다.”하였다. 서장(書狀)에 이르기를,“군관(軍官) 김몽호(金夢虎)의 수본(手本)에 ‘지난 9월 24일 녹둔도의 접전(接戰)에서 힘껏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은 신급제(新及第) 오형(吳亨)과 임경번(林景藩) 등 11인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낼 때 염습(殮襲)할 때 시신에 솜으로 찍어 바르는 향나무 담근 물 향수(香水)로 목욕시키며 자세히 살펴보니 오형(吳亨)은 얼굴이 가로 잘리고 목덜미 왼쪽도 비스듬히 절단되었으며 등에는 화살을 맞았습니다. 임경번은 왼쪽 겨드랑이에 화살을 맞았고 얼굴에도 화살을 맞았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녹둔도가 함락될 적에 장사(將士)와 군민(軍民)들은 한결같이 모두 바람에 쓰러지듯 속수무책으로 잡혀간 사람이 여러 사람이었지만 오직 오형(吳亨) 등 11인만이 모두들 용맹스럽고 날랜 군사로서 몸으로 적의 칼날을 막으며 죽을 때까지 항전(抗戰)하였습니다. 여러 대의 화살을 몸에 맞기도 하고 칼날에 얼굴이 베어지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머리가 잘리고 눈알이 뽑혔지만 끝까지 무릎을 꿇지 아니하였습니다. 피가 전장(戰場)을 뒤덮었고 뼈가 모래와 자갈밭 위에 널렸었습니다. 그 충성을 다해 목숨을 바쳐 싸운 의거는 너무나 늠름하여 기릴 만하니 관리들이 죽었을 때에 나라에서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지내주는 사제(賜祭),공신의 신주를 사당에 봉안하는 배향(配享),공신이 죽은 뒤에 관직의 품계를 올려주는 추증(追贈),사우(祠宇)를 건립해주는 건사(建祠)를 해주는 휼전(恤典)을 시행하소서.”하였다.

1588년 1월 27일 북병사(北兵使)의 정무(政務)에 관하여 국왕에게 올리는 문서 계본(啓本)에 경원(慶源)의 여진족 번호(藩胡) 중 녹둔도(鹿屯島)에서 오랑캐 마을에 이달 14일에 본도(本道)의 토병(土兵) 및 경장사(京將士) 2천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눠 들여보내 2경(二更:해시(亥時 밤 21시 – 23시))에 행군하고 3경(三更: 자시(子時 밤 23시 – 01시))에 강을 건넜다가 15일 해가 떠 밝아지는 평명(平明)에 그들이 오랑캐가 치고 사는 장막(帳幕)인 궁려(穹慮) 2백여 좌(坐)를 약탈하거나 노략질하는 분탕(焚蕩)하고 오랑캐 머리 3백 80급(級), 말 9필, 소 20수(首)를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는 참획(斬獲)하고 전군(全軍)이 무사히 돌아왔다고 하였다.
 
1800년대 이후 두만강(豆滿江) 상류의 모래가 유속(流速)에 밀려 내려와 북해(北海)의 녹둔도와 그 대안(對岸) 사이에 퇴적하여 육지와 연결되었다. 1860년(철종 11) 청(淸)나라와 러시아의 베이징조약 체결로 북해(北海:함경도와 북간도 사이의 바다)의 녹둔도(鹿屯島)가 러시아 영토가 되어버린 것을 1889년 알고 청나라에 항의하고 녹둔도(鹿屯島)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는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이 1885∼1905년경 북해(北海)와 연해주 일대를 16년간 직접 답사하여 제작한 함경도 및 옛 고구려국(高句麗國),발해국(渤海國)지역 지도이다. 아국여지도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대한제국시대의 전통적인 관방지도(關防地圖)라 할 수 있으며 고급 펄프지에 수묵과 채색으로 그린 회화식 지도로 20면으로 접혀져 있어서 펼치면 세로 길이가 3m나 된다. 맨 앞에 목록이 있고 지도 여백에 지역별 가구 수, 거주 인구 수, 물산, 군사관계, 인근 지역과의 거리 등의 정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1만여 명의 대한국인들이 살고 있었던 옛 고구려국(高句麗國),발해국(渤海國) 지역의 사정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아국여지도를 보면 북해(北海:함경도와 북간도 사이의 바다)에 있던 러시아의 영토가 되어 있는 녹둔도(鹿屯島)는 당시 대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대한국(大韓國)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녹둔도에는 113가구, 822명의 대한국인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모두 대한국(大韓國)의 풍습과 가르침을 높이 숭상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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