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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옛적에(18)-유고연방의 해체와 내분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20/09/03 [21:00]

옛날옛적에(18)-유고연방의 해체와 내분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20/09/03 [21:00]

  얼마 전 서기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벌어졌던 큰 사건들 중에서, 당시 세계 양대 강국이던 미국과 러시아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얘기했었지. 그런데 21세기 개막 바로 전에도 그에 못지 않게 황당한 사건들이 아주 다양하게 벌어졌었다는 걸 알아 둬야 할 것 같구나

 

 

   그 사건들은 주로 비뚜러진 종교적 맹신에서 시작되었는데, 사실 동양과 달리 서양 역사는 시종일관 거의 종교적(‘신앙적이라는 말이 더 맞겠다만) 갈등의 역사나 다름없었지. 거기에다가 서기 6세기 경부터는 마호멧이 창시한 이슬람교가 서양의 기독교와 대충돌하면서 좀 더 복잡하게 신앙적 갈등이 전개될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이차대전 후에 그처럼 복잡했던 유럽지방의 신앙적 갈등이 이상하리만큼 평온상태를 유지했지. 거의 60년 정도 평온했으니까, 그건 유럽 역사를 통털어서 보더라도 아주 특이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겠지. 특이한 정도가 아니라 기적적인 일이라고나 할 수 있었지. 하지만 기적이나 특이한 시대가 오래 갈 리는 만무했거든. 참고 참았던 신앙적 갈등들은 중세 이후 유럽역사에서 화약고 노릇을 해 온 바 있던 발칸반도에서 결국 폭발하고 말았지

  

   쏘비에트연방이 해체되자 지난 세기에 유럽지방의 화약고였던 발칸반도의 여러 민족들을 통합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연방(유고연방)에도 민족국가 건설 바람이 불어 닥쳤다.

 

   유고슬라비아는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오스만투르크제국은 발칸반도 지역의 기독교 계열 민족들도 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적당히 공존하고 있었다.

 

   기독교 또한 로마카톨릭과 동방정교 계열이 공존했으며, 민족적으로도 각 종교가 배타적인 채로 뒤섞여있어서 언제나 갈등이 표면화될 소지가 있었다.

 

   그런 복잡한 내부 정세를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적당히 조합해 만든 티토이즘으로 강력한 통합적 지도력을 수십년간 구사하던 티토대통령이 사망하자 그 갈등은 겉잡을 수 없이 현실화되었다.

 

   기독교계와 이슬람계의 대립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민족자립국가 수립의 열망은 주로 기독교계측이 이슬람계에 대해 강폭한 무력을 행사하면서 수많은 사상자와 난민들이 발생했고, 그 와중에 여섯 개의 나라들로 나뉘어졌다. 그 과정은 수십년간 잠재해있던 민족간인종간종교간의 갈등이 통제불능한 상태로 폭발하여 피로 피를 씻는 무장충돌이 벌어지고 말았다.

 

   유고연방 구성원들은 모두 남(유고) 슬라브족에 속하고 언어도 유사하지만, 세르비아계크로아티아계이슬람계로 구분되고, 정치문화종교적 차이가 현저했다.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는 기독교 계통이면서도 각각 그리이스정교와 로마카톨릭으로서 역사적 대립이 심했었다.

 

   이슬람계도 원래는 보고밀파 기독교도였으며 그리이스정교와 로마카톨릭 모두로부터 탄압을 받아 왔었는데, 서기 1389년의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을 격파한 오스만투르크가 보고밀파를 보호해주는 대신 이슬람교로 개종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서기 190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강제합병한 후, 일차대전이 끝난 서기 1918년에 유고슬라비아가 수립되면서 정교를 신봉하는 150만명 이상의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 지역에 남게 되어 개종을 강요받게 되었다.

 

   그 후 이차대전 초기인 서기 194146일에 나치스가 유고에 침공한 후 크로아티아인들을 이용하고저 크로아티아 독립국가를 세우게 했는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대부분과 세르비아 절반이 포함되었다.

크로아티아는 나치스의 권고로 유대인 3만명과 집시 2만명 가량을 대대적으로 학살했고, 다시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에서 세르비아인 40여만명을 학살했다. 마찬가지로 나치스 통제하에 있던 세르비아도 유태인과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했다.

 

   이차대전후 티토가 유고슬라비아를 건설하여 융화정책에 성공함으로써 수십년간 분쟁을 막을 수 있었고,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는 각 계열간의 통혼비율이 50%가 넘을 정도였다. 그러나 티토 사망 후에 각 집단의 지도자들이 과거의 원한을 크게 부추기면서 집권함으로써 분쟁은 급속히 진행되었다.

 

   서기 1980년의 티토 사망 이후 정치경제적 갈등이 심해지자 세르비아의 지도자 밀로셰비치와 크로아티아의 지도자 투지만이 강성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문제는 커지기 시작했다.

 

   우선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비슬라브계에 속하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서기 19916월에 독립을 선포했는데, 유고연방은 사태를 좌시하지 않고 7개월간 전쟁을 벌여서 사망자 만여명에 난민도 70여만명 발생했다.

 

   내전이 일단 끝난 후인 서기 19921월에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가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아 독립국가 수립을 선포한 수 여러 계열간의 갈등이 심해져서 3월 말에는 세르비아계가 기권한 상태에서 주민투표를 통하여 보스니아가 독립하는 안건이 가결되자 내전은 다시 격화되었다.

 

   45일에 사라예보에서 시작된 내전에서 세르비아계는 세르비아 민병대의 도움을 받아서 이슬람교도들을 공격하여 학살을 자행했다. 무력이 약한 이슬람계는 패퇴할 수밖에 없었고, 세르비아계는 이슬람교 지도자들과 크로아티아계 지식인들을 학살하고 이슬람교도들을 추방했다. 그 과정에서 이슬람계 주민들 중 활동력있는 남성들은 곳곳에서 학살당했고 여성들에게는 공공연히 강간이 자행되었다.   

 

   그러한 참상이 외부로 알려지자 서기 19934월에 유엔안보리는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도시 스레브레니차를 유엔평화유지군이 지키는 안전지역으로 선포하고, 사라예보와 고라즈데 등 다섯개 도시도 안전지역에 추가했다.

 

   그러나 밀로셰비치는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그에 대응해서 유엔이 세르비아계를 공습하는 공방전이 계속되었는데, 서기 1995711일에는 안전지역 선포지역에까지 침입한 세르비아계 지도자 믈라디치 휘하의 군사들이 이슬람교도들을 다시 대대적으로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차대전 이후 단일 규모로는 최대의 학살(4만 주민 중 7,000여명)에 경악한 세계 여론에 힘입은 나토는 세르비아계 군대에 3주간 맹폭을 가했고, 크로아티아 정규군도 세르비아계에게 대대적 공격을 가했다. 또다시 수개월간의 공방전을 치른 후 무력행사에 한계를 느낀 밀로셰비치가 1128일에 오하이오의 데이턴에서 보스니아 평화협정체결에 응함으로써 일단 정전상태에 들어갔다.

 

   협정에 따라 보스니아는 단일 연방체제하에 세르비아계크로아티아계이슬람계의 세 구역으로 분리되었다.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집단은 이슬람계로서, 주로 종교적 편견에 사로잡힌 세르비아인들에 의한 계획적인 제노사이드의 희생자들이었다.

 

   수년간 소강상태에 있던 구 유고연방 지역 중 코소보 자치주에 서기 1999년 초 세르비아 병력이 침공을 시도했다. 코소보 전체 인구의 90%에 달하는 알바니아 출신자들은 대부분 이슬람계였는데, 소수파인 세르비아계가 이슬람계를 축출해버리고 세르비아에 편입시키려했던 것이다.

 

   데이턴 협정에서 서구 국가들이 세르비아의 코소보 지배를 인정한 후 알바니아인들은 코소보해방군을 결성했는데, 서기 1998년에 알바니아계를 탄압하던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자 세르비아가 본격 침공을 감행한 것이다. 침략군이 코소보에서 다시 학살을 자행한 사실이 국제감시단에 의해 알려져 서구 국가들이 세르비아 병력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묵살되자 나토군은 세르비아를 공습했다.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세르비아군에 밀려서 130만명 가량의 대규모 난민이 발생했는데, 그 중 74만명 정도가 마케도니아알바니아몬테네그로에 밀려들었고, 세르비아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학살은 더욱 확대되어 10여만명이 희생되었다.

 

   그에 따라 유엔 국제형사법정은 서기 1999524일에 밀로셰비치를 반인도범죄 및 전쟁범죄혐의로 기소했고 미국은 지상군 파견을 고려했으며, 러시아의 옐친대통령까지 세르비아를 비난하고 나서자 63일에 밀로셰비치는 평화협정에 응하여 세르비아군을 철수하고 나토평화유지군 5만명이 주둔하게 되었다. 코소보는 세르비아의 일부가 된 채 자치권을 얻었고, 알바니아계 난민 백만명 이상이 다시 돌아와 살게 되었다.

 

   학살주범인 밀로셰비치는 서기 20013월에 세르비아의 코슈투니차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헤이그 국제형사법정에 인도되었으며 제노사이드 혐의가 적용되어 수감생활 하던 중 사망했다.

 

   미소간 냉전이 끝나기 무섭게 벌어진 이 발칸 내전은,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서 언제든지 대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지. 그리고 그 이후 벌어진 세계적 갈등에서도 가장 큰 역할을 한 것도 역시 헤브라이즘에 기초한 그들 신앙들이었지. 건전한 인간성의 발전이 아닌 괴상한 맹신에 사로잡힌 왜곡된 교리나 신앙조직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악을 저지를 수 있는가를 경계해야만 하겠지.

 

  당시 남북한 또한 서로 다른 사상체계로 첨예하게 갈등하고 있었으니, 민족통일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정통사상에 의한 동질성 회복이 우선되어야만 했겠지만, '민족'이라는 단어가 남한에서는 '보수꼴통'도, '진보주의자'도 꺼리는 단어가 되었고, 북한에서조차 전통적 민족 개념 대신 주체사상에 입각한 '신(주체) 민족'으로 변질되어, 갈팡질팡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는구나. 그러니 어느 세월에 통일을 바라 볼 수 있었겠나마는...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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