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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력사 사건] 위정척사운동

이형주 기자 | 기사입력 2020/08/03 [15:59]

[조선력사 사건] 위정척사운동

이형주 기자 | 입력 : 2020/08/03 [15:59]

 

위정척사운동

 

19세기 중엽 자본주의침략으로부터 봉건국가를 지키기 위하여 애국적인 봉건유생들이 중심이 되여 벌린 반침략투쟁.

위정척사론은 자본주의침략의 앞잡이로 침투한 카톨릭교를 반대하는 애국적유생들의 사상으로 발생하였다. 《위정척사》란 《바른학문》(유학)을 지키고 《사학》(요사스러운 학문 즉 카톨릭교)을 배척한다는 뜻이다.

19세기중엽 봉건사회의 위기가 심회되고 외래침략이 더욱 격화되자 인민들의 반침략투쟁에 고무된 애국적인 유생들은 《척양척왜》의 구호를 들고 위정척사운동을 벌렸다. 위정척사운동의 대표자는 리항로, 기정진, 최익현, 류린석 등이였다.

1886년에 프랑스침략자들이 우리 나라에 기여들었을때 위정척사론자들은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에 적극 참가하였다. 기정진은 1866년 8월 국왕에게 낸 글에서 봉건정부가 반침략적립장을 취할것을 제기하면서 자본주의침략의 위험성을 낱낱이 발가놓았다. 리항로를 비롯한 위정척사론자들은 프랑스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에 직접 참가하였다. 이러한 위정척사운동은 대원군집권시기에 봉건정부로부터 일정한 지지를 받았다. 1873년에 민가일당이 정권을 잡은 후 봉건정부가 외래침략세력에 굴종하는 매국적인 정책을 실시하게 되자 위정척사운동은 더욱 세차게 벌어졌다. 특히 위정척사론자들은 《강화도조약》조작후 강화되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침략책동을 반대하여 상소투쟁을 힘있게 벌렸다. 1876년 1월에 류린석을 비롯한 50여명의 유생들이 상소투쟁에 나섰다. 1880년대에 이르러 민족적위기가 더욱 격화되자 위정척사운동은 더욱 적극화되였다. 1881년 2월에 경상도유생들은 령남만인련소를 가지고 상소운동에 나섰으며 뒤이어 경기도,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 등 전국각지의 유생들이 서울에 모여들어 봉건정부에 상소를 하였다. 애국적유생들은 상소들에서 리유원, 리최응을 비롯한 매국적관료집단의 우두머리들을 규탄하였으며 봉건정부의 대내외정책을 준렬히 단죄하였다. 위정척사운동은 새로운 력사적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낡은 사상과 제도의 테두리안에서 민족적위기를 타개하고 나라의 부강발전을 이룩하려는 근본적인 제한성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그의 반침략적, 애국적지향으로 하여 민족적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인민들의 반침략애국투쟁에서 일정하게 긍정적역할을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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