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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력사 인물] 애국문화활동가 신채호

이형주 기자 | 기사입력 2020/05/27 [09:27]

[조선력사 인물] 애국문화활동가 신채호

이형주 기자 | 입력 : 2020/05/27 [09:27]

 

▲ 단재 신채호선생과 조선상고사. 자료사진     © 이형주 기자

 

조선의 력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와는 많이 다르다. 우리는 일제가 조작해 만든 조선사35권의 식민사관과 이병도일당이 조작해 만든 대국사관의 반도사관을 중심으로 한국사와 국사교과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반면, 북은 식민사관과 반도사관을 탈피한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이 남과 북은 역사의 특징을 보는 관점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지에서 "조선을 바로 알아야 통일이 가까워 집니다"라는 신념으로 북조선이 알리는 '조선력사'를 인터넷매체 조선의 오늘이 공개한 게시물을 여과없이 게재한다.[편집자 주]  

 

애국문화활동가 신채호

 

신채호(1880~1936년)는 20세기초의 권위있는 력사학자였으며 이름있는 작가, 정론가였다.

충청북도 청주의 한 봉건유생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벌써 20살때 조선봉건왕조봉건국가의 최고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 박사벼슬을 하였다. 그는 19세기말 20세기초에 민족적위기가 더욱 격화되자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반일투쟁무대에 나섰다.

신채호는 첫 시기에 애국문화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하여 《서우》, 《서북학회월보》 등 잡지들에 인민들의 민족적각성을 높여 그들을 반일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는 글들을 수많이 발표하였다. 그는 문필활동을 하는 한편 1907년 9월에는 량기택, 리동휘, 리승훈 등과 함께 반일비밀정치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정치활동을 벌렸다. 이 시기에 그는 리승훈이 세운 정주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국사와 서양사를 가르쳤는데 력사강의를 얼마나 잘하였는지 그 소문이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널리 퍼졌다고 한다.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자 그는 1909년에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애국문화활동가들인 리동휘 등과 함께 《광복회》를 조직하고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을 벌렸다. 이때 민족의 계몽을 위하여 《해조신문》을 찍어냈다.

그후 주체4(1915)년경에 중국으로 갔다. 그는 베이징에서 잡지 《천고》를 발간하여 반일애국사상을 선전하기에 힘썼다. 주체8(1919)년 3. 1운동이 있은 뒤에는 상해로 가서 상해림시정부에 관여하다가 이 정부의 외세의존정책에 분격을 참지 못하고 림시정부와 결별하였다. 그리고 상해에서 조선사람들이 발간하는 신문을 맡아보았고 중국신문에도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신채호는 애국문화활동가였을뿐아니라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력사가이며 문학가였다. 그는 나라가 독립을 제대로 유지하자면 인민들이 자기 나라를 똑똑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 자신이 조선력사를 깊이 연구하고 널리 해설선전하였다. 국내에서 활동할 때는 물론 해외에 나가서도 력사연구를 계속하였다. 그가 쓴 력사관계책으로는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 《을지문덕전》, 《리순신전》 등이 있다. 그는 력사서술뿐아니라 문학작품을 통해서도 인민들속에서 애국주의정신과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정신을 불러일으키는데 힘썼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로서는 소설 《꿈하늘》과 《룡과 룡의 대격전》, 시《너의것》, 정론《선언》 등이 있다.

신채호는 자신의 계급적제한성으로 하여 반일의병운동 등 적극적인 반일투쟁에는 참가하지 못하였다. 주체17(1928)년에 일제헌병대에 체포되여 10년형을 언도받고 려순감옥에서 옥중생활을 하다가 주체25(1936)년 3월에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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