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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101)-돌아가지 못한 충혼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9/10/17 [19:21]

대한정통사(101)-돌아가지 못한 충혼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9/10/17 [19:21]

의왕의 망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본토의 대동단 조직이 대부분 체포당하자 김가진은 다른 단원들과 의논한 후 4253(1920) 36일자로 대동단 본부를 상해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 대동단은 '사회주의 표방'한 첫 정치단체이다. 대동단 창립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권태석(앞줄 왼쪽)은 1945년 8·15 직전 발족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무경부장을 맡기도 했다. 사진은 해방 이후 한국독립당사 근처에서 한독당 중앙상임위원 조경한(앞줄 가운데), 안재홍(앞줄 오른쪽)과 함께한 모습이다.     © 편집부

 

그리고는 본토 내 점조직을 활용해서 계속 광복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운동자금의 마련이 용이하지 못하다는 데 있었다. 의왕의 망명만 성공했더라면 의왕이 예치하고 있던 상해덕화은행의 비밀자금을 크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었으나 대동단은 물론 임정까지도 자금난에 허덕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몇 명밖에 남지 않은 간부단원들은 극비밀리에 본토에 잠입해서 자금확보에 진력했으나, 그들마저 4253(1920) 57일에 모두 검거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따라서 대동단의 활동에는 커다란 제약이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김가진은 상해임정으로부터 큰 환영을 받기는 했으나 상해임정도 자금부족으로 극도로 쪼리고 있었기 때문에 김가진의 망명생활은 다른 임정요인들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그는 상해 프랑스조계의 패륵로(貝勒路)에 있는 싸구려 셋방에서 하루 한 끼도 먹기 힘든 빈곤과 망국의 통한으로 인한 고혈압의 발작으로 고생했는데, 결국 4255(1922) 74일에 병 뒷바라지를 해 오던 아들과 동지들의 노력도 보람 없이 77세를 일기로 일세를 풍미하던 풍운아로서의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김가진의 타계소식을 들은 서울의 가족들은 그의 유해나마 서울로 운구하려 했으나, 그들 역시 적선동의 셋집에서 예전에 가지고 있던 세간살이를 차례로 팔아가면서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여의치 않았다. 왜경들은 김가진의 망명 이후 식구들을 엄중히 감시하면서 그 집에 왕래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문초했으므로 방문객들의 발길마저 끊긴 지 오랜 식구들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이를 보다 못한 유림에서는 그 집에서 문상객을 임시로 받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주는 한편, 째 아들 용한을 상해로 보내어 상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상해로 간 용한은 고국으로 운구하려 했으나, 김가진의 시신은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상해의 만국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많은 망명지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710일에 거행되었고, 서울에서는 유림이 주축이 되어 723일에 추도식을 가짐으로써 최후의 밀사가 마지막 가는 길에 명복을 빌었다.

 

** 의왕의 망명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렇지 않아도 공화파가 득세하고 있던 임정에서는 더욱 공화주의적 입장을 공고히 해 갔음을 다음 자료로 알 수 있음(독립신문, 대한민국 218일자 재인용).

 

의친왕이 상해로 내()하려 했음을 기화(奇貨)로 하여, 교활한 적중(敵衆)은 이를 임시정부가 인심 수람(收攬)의 일책으로 의친왕을 그 수령으로 삼으며 함이라고 비난하도다. () 8월 임시의정원에서 임시헌법을 통과할 시에 헌법 초안 중에 구황실 우대의 일조가 어떻게 (00)?(2字缺)하게 된 기록을 보면 우리 독립운동의 정신을 알지오. 또 김가진 씨가 내호(來扈)한 지 1()이 넘되 임시정부에 아무 직임을 대()치 아니함을 보아도 이를 알 것이리라. ()하고 우()한 적이여, 임시정부에 이미 대통령이 있고 국무총리 이하 각부 총장이 있으니, 의친왕이나 기타 황족 혹은 귀족을 어디다 추대하리오. 여운형씨가 동경서 성언(聲言)한 바와 같이 황족이나 귀족이 신한정부의 하에 (0)?(1字缺)함을 환영하노라. 그러나 오직 대한민국의 일공민(一公民)으로 환영할 뿐이라.’

 

이로써 볼 때 상해임정에서 의친왕을 영도자로 삼을 경우에 흐트러져 있던 (항일투쟁가들의) 인심이 모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만은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망명해 간 대한국의 지도급 인사들에 대한 처우에 대단히 인색했던 상해임정은 김가진이 지닌 상징적 중요성(임시정부가 아닌 망명정부구성 가능성)을 무시해 버림으로써, 스스로의 국제법적인 합법성(국제적 승인을 얻을 수 있는 단일화된 국권회복운동단체로서의 법통성’)과 민족사적인 정통성에 있어서의 약화를 자초했다고 볼 수도 있음.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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