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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국가 제외' 대 '백색국가 제외' 최후의 승자는?

최근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재빠른 대응이야 말로 멀지않아 민관 협력에 빛나는 공동의 선으로 기억 될 것이다.

김명민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9/08/14 [17:09]

'백색국가 제외' 대 '백색국가 제외' 최후의 승자는?

최근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재빠른 대응이야 말로 멀지않아 민관 협력에 빛나는 공동의 선으로 기억 될 것이다.

김명민 칼럼니스트 | 입력 : 2019/08/14 [17:09]

▲ 한국, 일본조치에 맞대응 '백색국가 제외 카드' <사진=연합>     © 김명민 칼럼니스트

 
구한말 을사늑약 전후 일본 군국주의에 앞장섰거나 그에 협력한 부역자들은 미관말직에서부터 고관대작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녹을 먹는 자들 중 일신의 영달과 일문의 무사 태평을 위해 언제든지 백성을 배반할 수 있을 사유의  정신을 소유한 자들이 아니었을까! 
 
왜냐면 나라의 녹을 먹었던 사람중에서나 혹은 나라의 녹 하고는 거리가 먼 미미한 존재의 하찮은 백성중에서도 을사늑약으로 강제 조약한 일본 군국주의에 저항 했거나 또는 부역한 사람들은 항시 따로 존재 했기 때문이다. 각각의 상황과 남모르는 이유가 있었다고는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부역한 자들의 DNA란! 또 저항한 사람들의 DNA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추측컨데 이들 DNA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자면 신라중대 이후 북방에서 유입된 스키타이족들이 6두품 관료 집단을 형성하고 지방 호족 세력과 결탁하여 반신라 세력을 규합하면서 천년사직을 무너뜨린다. 결국 김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게 되면서 이때 은밀히 왕건 밑으로 들어가 관직의 보장과 더불어 일신의 영달과 일문의 무사태평을 누리게 된다. 그 유전자는 대를 이어서 줄기차게 왕조의 중간 관료를 유지하며 고려 망국 때까지 계승된다. 그러면서 고황제 이성계의 연방 대조선 518년 사직의 그 유명한 노련의 일파로 부활하여  일명 “광명회” 영어명으로는 “일루미나이티”로 불려지는 그들이 바로 우리가 알고있는 그들이다. 아묵리가 대륙(아메리카)에서 1775년 일루미나이티 창설을 주도하고 이듬해 미합중국 건국을 표방 한 것으로서 재야학파 측 진보사학의 큰 물음은 이제 비켜갈 수 없음으로 시대유감이 된다. 그러나 식민사학의 잔재인 강단사학에서는 감히 엄두도 못낼 충격적인 사실은 또 있다. 
 
아묵리가 대륙에서 1882년 중국인(199년 한중수교 이전까지는 중공으로 불리었음)추방령을 내리고 1903년 부터는 지금의 한반도로 18,000톤에 이르는 5대의 여객선이 분주히 태평양을 횡단한다. 그로부터 1919년 근 20년 가까이 자연통계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한반도에서 일어나기도 하는데 1903~6년 당시의 인구 560만명에서 1919년 기미 독립선언서 발표에서와 같이 약 2,000만명에 육박하는 그야말로  기하학적 인구폭발이 일어났던 것이다. 중공지역을 포함한 유라시아 대륙과 아묵리가 대륙 등지에서 마구 쏟아져 들어왔던 시기 1906년 조선통감부 초대통감 조선인 임춘모(이토히로부미)가 부임하는 시기하고도 겹쳐진다. 이때 송병준, 윤시병 등이 조직한 친일단체인 일진회는 이토가 부임할 때 남대문에 ‘환영’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다. 이후 일진회의 회원 100여 명이 관찰사, 군수 등에 ‘발탁’ 되기도 했으며, 고종퇴위 강요, 의병토벌 참여, 한일합병 촉구 성명발표 등 파렴치한 친일행각을 이어갔던 시기에 우리는 그들이야 말로 주권 상실의 원흉이요, 민족반역 매국노의 뿌리로서 기억되고 있다.
 
이들 더러운 집단의 세력들이 살아 있었기에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 하였으나, 점령군이었던 미군정 치하 이승만을 앞장세운 단독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고 광복되지 못한 굴레는 체제의 친일에서 체제의 친미로 자연스럽게 수평이동 되며 반민특위(반민족행위처벌특별조사위원회)해산과 역사왜곡으로 오늘날 우리는 그 누구일지라도 청산되지 않은 오욕의 근대사를 숙명처럼 받아 들이는 현실을 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비추어 보건데 헌정이후 근,현대사의 질풍노도를 체득하는 과정에서 당시 Collabo(친일부역자)와 Resistance(독립군)의 정신을 가진 후손들의 입장차이는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보인다. 
 

▲ '독립은 못했으나 불매 운동은 한다' 각계 소비자 시민운동 확산     © 김명민 칼럼니스트

 
얼마전 일본발 한국의 백색국가 제외에 대한 한국 사회의 각계 반응을 놓고 보고있자면 그 정도의 차이는 각양지차이나, 분명한 것은 콜라보의 정신과 레지스탕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가의 제1야당의 반응과 정부와 여당의 조치 그리고 성난 민중의 도화선으로 점철 되어진 일본산 불매 운동을 하는 각각의 시민 행동들이 그것이다.
옛말에 민심은 천심이라고 했다. 일본의 경제보복을 제2의 일본침략으로 보고 독립운동은 못하였으나 불매운동은 한다라는 기조가 생기기 시작하여 너도나도 불매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시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촛불 항쟁으로 지난 당시의 정권을 몰아내고  5.18 민주화 운동으로 신군부의 쿠테타를 끌어내었던 저력의 민중에게는 큰 희생을 감당했을지언정 역사를 올바로 견인하는 집단지성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수렴과 조정을 통한 지도자의 덕목은 정책 행위에서 반드시 이것을 간과하지 못 할것이기에 정부의 강력한 이번 조치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13일 정부는 일본발 한국의 백색국가 제외에 대한 10일만의 조치로 우리 정부도 다음달 일본을 백색국가(수출국우대)에서 제외 시킨다고 발표했다. 이제 두고보면 알일이다.
 
건전한 상식과 올바른 이성으로 우리 문화와 역사를 사랑하고
자유가 확대 되어 가는 방향으로, 역사를 동인하는 것은 민중의 집단 지성이 만들어 내는 사회 혁명의 연속성에 있다는 것을 각인하면서 사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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