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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95)-유림선비들의 궐기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9/06/20 [12:12]

대한정통사(95)-유림선비들의 궐기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9/06/20 [12:12]

[플러스코리아=안재세 역사전문위원] 대한국의 유림선비들은 외세의 침범 이후 줄곧 반외세투쟁인 위정척사운동을 위시하여 의병 및 광복군 등의 결성에 앞장 서 왔다. 충군보국(忠君報國)이라는 대의명분에 투철한 유교적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사회적 지도층들이기도 했던 유림선비들의 자주독립투쟁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삼일광복투쟁이 추진되던 당시에는 유림사이에 긴밀한 연락관계가 잘 유지되지 못하여 독립선언 때 민족대표단에 참가하지 못하였지만, 유림은 유림대로 활발하게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자체행동에 돌입했다. 사실상 유림의 독립의지표시는 기미독립선언보다 수개월 앞선 무오독립선언에서 이미 표출된 바가 있었다.

 

무오독립선언의 무력적 배경인 의병과 광복군의 지도층 대부분이 광복투쟁을 위하여 망명한 유학자 출신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고, 무오독립선언은 바로 그들이 주도하여 선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 외견상으로는 점잖은 선비라는 일반적인 표현대로 대단히 신중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대한국인 사회의 그 어느 집단보다도 가장 투쟁적인 집단이 바로 유림이었던 것이다.

 

, 무오독립선언을 추진한 사람들은 전통적 유학자들 중에서도 애국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해 온 소위 개신유학자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의 취향은 전통적 유림과는 다소 다른 점도 있었기에 유림 내부적인 갈등의 소지가 잠재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전통적 유림의 입헌군주제적 성향 대신 개신유림은 공화제 지향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삼일광복투쟁에 있어서 유림의 적극적 참여가 없었던 것도 삼일광복투쟁 추진에 참여한 천도교기독교 계통의 대표들이 대체적으로 당시의 국제적 분위기에 맞추듯이(공화제 국가의 대표격인 미국의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 등), 그 당시로서는 대단히 생소했던 자유민주주의적 이념을 내세움으로써 사상적 갈등이 야기되었던 면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유생들 중에는 광무황제의 폭붕소식에 접하고 손병희 선생의 격고문과 같은 내용의 격문을 국민대회의 명의로 돌려서 선황제선황후(, 광무황제와 명성황후)의 원수를 설욕하자고 호소한 바 있었다. 그리고 삼일독립선언이 발표된 다음날에는 을사늑약 당시 홍성 의병진의 참모로서 왜구들에 의하여 대마도에 유배당했다가 특사로 풀려 나왔던 보령출신의 백관형유예근송주헌 등 10여 명이 수창동의 모 여관에 모여서, 융희황제를 복위시킴으로써 인심을 수습하여 독립을 성취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들 유림선비 중 앞의 세 명은 35일에 융희황제가 우제(虞祭)로 나가시는 도중에 청량리에서,

 

강산도 궁실도 인민도 전과 같으니 다시 황제자리에 좌정하시어 일국을 호령하시고 각 국에 통보하십시

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를 제지하는 왜경의 제지를 받아서 크게 말썽이 일어났다. 또 다른 유생 어대선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많은 사람이 모인 기회를 이용하여,

 

지금 빠리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고 있으니, 우리도 분발 노력하면 독립을 완수할 수 있다!”

는 취지의 연설을 하고,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외치면서 왜구들을 당황케 했다. 백 관형은 다시 여러 동지들과 함께 312일에 서울의 중화요리 집에서 회합하여,

 

대한국의 독립은 동포 이천만의 요구이다. 우리들은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의 후계자로서 독립을 요구한다.”

는 내용이 담긴 13도 대표자 명의로 된 독립요구서를 작성하여 그 날로 한 부를 왜총독에게 제출하였고, 한 부는 문일평과 백관형 등이 종로 보신각 앞으로 가지고 가서 군중 앞에서 낭독하고 독립투쟁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반외세투쟁에 있어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르기도 했던 유림의 광복투쟁 목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옛 체제의 발전적인 회복이었다. , 대한국인에 의한 독립제국(獨立帝國) 체제의 회복이었던 것이다. 33인의 대표였던 손병희는 체포된 후 예심판사가,

 

조선이 독립하면 어떤 정체의 나라를 세울 생각이었는가?”

라고 질문한 데 대해서,

민주정체로 할 생각이었다. 이 일은 나뿐만 아니라 일반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 나는 유럽전쟁(일차대전) 중 교도들과 우이동에 갔을 때 전쟁이 끝나면 상태가 일변하여 세계에 군()이란 없어질 것이라고 얘기한 일이 있다.”

라고 분명히 대답한 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손병희의 생각이 당시 대부분의 대한국인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의병항쟁의 주역인 유학자(유생)들은 여전히 농촌의 여론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일제의 신교육에 저항하여 서당교육을 강화함으로써 민중의 반일정서에 부합하면서 더욱 그 지위를 높여가고 있었다.

 

일찍이 을미사변 이후 두 차례나 홍주 의병을 지도하였고, 삼일광복투쟁 이후 김창숙과 안병찬 등 영남지방과 충청지방의 유림대표 137명의 서명을 받아 빠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이른바 빠리장서 사건을 주도한 바 있는 유학자 지산 김복한(志山 金福漢)은 독립청원서에서,

 

하룻밤 사이에 창졸히 우리 임금이 돌아가시어 온 나라가 흉흉하며, 아픔이 땅 끝에 닿으나 원통함을 호소할 곳이 없도다. 국장 모시는 날에 각 교단과 사회단체와 개인과 남녀가 오히려 독립을 외치는 소리로 우리 임금의 영혼을 위로하며, 비록 포박과 살육이 눈앞에 당하여도 맨 손으로 앞을 다투며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천리에 바람이 같지 아니하고, 백리에 풍속이 같지 아니한 것인데, 저들은 우리 대한국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면서 저들 나라의 정치생리를 가지고 우리 대한국의 풍속을 요리하려고 하니, 풍속을 졸연히 변하고 저함도 불가능하거니와 저들의 정치생리라는 것은 어지럽히기에 족하니 이는 행하여질 수가 없음이 분명함에도, 공회에서 말하기를 대한국민이 일본에 따라붙기를 원한 지 오래라고 한다니 대한국민은 스스로 대한국인이외다

종석 등은 산야의 버린 몸으로 외방의 사실을 자세히 듣지는 못하였으나, 오히려 오랜 나라의 신자(臣子)로서 선군(先君)의 유풍을 따라 유문(儒門)에 종사하다가, 이제 세계가 유신하려는 날을 당하여 나라의 유무(有無)가 이 기회에 있기에 나라 없이 사는 것보다는 나라 있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여

라고 하여, 일제에 의하여 왜곡되어 버린 우리의 풍속을 회복하고자 함을 명백히 밝혔다.

기미독립선언문 자체는 일종의 낙관적 평화주의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그것은 삼일광복투쟁의 주도세력이 민주정체를 염두에 두었던 손병희 등 천도교의 일부 지도층과 미국식 민주정체를 꿈꾸던 기독교 신자들이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비폭력주의와 공화주의는 짝을 이루고 있었으며, 공화주의를 의식한 집단은 주로 기독교 신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기독교도들은 대다수가 신교육을 받고 1차 대전을 전후한 국제정세를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국민에게 참정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망 없는 평화적 시위보다는 단 하나 남은 현실적인 대안인 무력항쟁을 주도한 유림선비들은,

각국의 승인이 여의치 않으면 군병을 일으켜서 경성(서울)을 강공하여 대한국황실을 복벽하고 옛날의 정치로 복구하여야 한다

는 유림선비 이희섭의 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옛 제도의 복구를 거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삼일광복투쟁이 중기 이후 도시에서 농촌으로, ()학교 학생으로부터 구()학교 학생(, 서당 학생)에게로, 또 비폭력운동으로부터 폭력운동으로 변해가면서 황정복고는 더욱 강하게 드러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 삼일광복투쟁 과정에서 나타난 도시 인텔리의 비폭력공화주의 노선과 농촌 인텔리의 폭력복벽주의 노선의 잠재적 대립은 전자보다 후자 쪽이 우세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러한 두 노선의 대립은 그 후 상해임시정부의 외교노선과 간도 및 노령의 광복군 노선으로 뚜렷하게 표면화되어 갔다.

 

 

***

손병희를 비롯한 동학계열 인사들과 기독교계열의 애국계몽 관련 인사들이 한일합방 및 광무황제 시해에 대해 취한 태도들은 매우 모호한 것이었음. 그 예를 들자면,

1. 한일합방에 대한 의견을 묻는 판사의 질문에 대한 손병희의 답변 :

우리들은 일청전쟁 당시 정부를 전복하지 않고는 인민의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선언을 뜻한 바 있지만 성취하지 못하였다. 한번은 정부가 전복될 시기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별로 감상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일청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동학민중항쟁으로 정부를 전복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이후로 항상 정부를 전복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으므로(, ‘어차피 전복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외세에 의해 정부가 전복된 것을 별로 애통한 마음이 없었다는 뜻임.)

2. 같은 질문에 대한 최린의 대답 :

반대하는 감정이다본인뿐만 아니라 한일합방이 될 때 조선민족이 다 가만히 있은 것은 망국의 원인을 일본에게만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스스로 망한 것인 줄 알고 대세를 어찌하지 못하여 그대로 있었으나, 합방 후 10년 동안 여지없이 학대를 받았는데 지금은 세계 대세에 순응코자 함이다.”(합방에 반대하여 의병항쟁독립투쟁에 몸 바치고 있던 애국자들 및 합방에 대해서 자결로 항의한 수많은 충신열사들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 아전인수 격 변명임.)

3. 조선이 독립한 후 어떤 정체(政體)를 세울 생각이었는가? 라는 판사의 질문에 대한 손병희의 답변 :

민주정체로 할 생각이었다. 그 사실은 나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또 나는 구주대전이 한참일 무렵 교도 등과 우이동에 갔을 때, 전쟁이 끝났을 때는 상황이 일변하여 세상에 군주라는 것은 없어지게 될 것이라 이야기한 적이 있다.”(그러나 그러한 상황 판단은 영국과 일본 등 많은 입헌군주국들이 온존한 것으로 볼 때 빗나간 것임.)

4. 광무황제의 죽음에 대한 감상을 물은 데 대하여,

(1) 손병희의 대답 : “별로 어떤 감상은 없다. 나이 많으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2) 이승훈의 대답 : “별로 감상이라고는 없고, 단지 사람이 사망하였다고 함을 들었을 때 슬픈 마음을 갖는 것은 누구든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 권동진오세창최남선 등 : “아무 감상 없었다.”

(4) 천도교도시천교도: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시천교도는, “전하는 교조 최시형을 강살한 자로오인은 하등 애도의 뜻을 표할 필요가 없다.”고 함.

강원도 회양군 하북면 초일리의 회양천도교구장 송환순은, “민중의 행복은 군주정부를 폐하고 공화정치 하에 조선을 독립시켜 동양의 평화를 확립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공화정치로서 국가를 수립하려면 종교에 의하여 통일하고 지배할 수밖에 없다. 우리 교주 손병희 선생 외 33명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자 등은 이 주의 하에 분기하여 독립운동을 개시한 것이니, 조선민족된 자는 동포를 위하여 동양 영원평화를 위하여 이를 방관할 때가 아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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