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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83)-불멸의 의병혼(義兵魂)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11/17 [09:56]

대한정통사(83)-불멸의 의병혼(義兵魂)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11/17 [09:56]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음을 알고 을미의병에 앞장섰던 고매한 선비 유인석은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한때는 충주성을 함락하며 크게 위세를 떨쳤으나, 일제의 조종을 받는 관군의 우세한 화력과 병력에 밀려서 패퇴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 프랑스 언론 르 프티 주르날에 실린 남대문 전투     © 편집부

 

광무황제의 칙령으로 모든 의병부대들이 해산되어 제각기 본업으로 돌아갈 때도 유인석만은 자신이 지휘하고 있던 의병을 해산하지 않았다. 칙령까지 거부한 이유는 그가,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는데 한 번 일어났던 의병을 해산할 수는 없으며, 황제의 칙령도 황제의 본뜻이 아닌 왜적들의 농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왜적이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의병항쟁을 계속해야 한다.”
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즉, ‘잘못된 칙령은 따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유인석은 항쟁을 계속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인하여 점점 북쪽으로 밀려 가다가, 황해도와 평안도의 산악지대를 거쳐서 결국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항쟁의 근거지를 옮겨 가게 되었다. 평안도지방에서 많은 지사들의 동조를 얻은 유인석은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서 ‘복진지계(復振之計)’를 꾸미기도 했으나,. 유인석의병장은 단순히 후퇴만을 한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많은 뜻있는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더욱 더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자주독립투쟁을 할 수 있는 발판을 굳힘. 일예로 평안도 개천의 저명한 유학자이던 현여준은 개천까지 온 유인석 의병장과 깊은 교분을 맺고, 자신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관서지방 유림들의 집합장소인 숭화재(崇華齋)를 항일투쟁의 근거지로 삼고, 유인석 의병장을 스승이자 동지로 삼아서 복진지계를 함께 추진함. 그 후 모든 가산을 총정리하여 전 가족을 이끌고 압록강 건너편인 서간도 임강현으로 옮겨 가서 독립운동 기지로 쓸 토지를 매입하여 동포들의 생업터전과 학교부지를 마련하고 직접 학교(중명학교) 교재까지 만들어 동포들의 민족정신 앙양에 힘썼으며, 나중에 일제 밀정에게 독살당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민족교육과 사관육성에 혼신의 열정을 쏟음. (독립유공자 현여준 선생의 자부 이보애여사(서1994.3.7 타계)의 증언에 의함)


 워낙 관군에 비해서 열세에 몰리고 있었으므로 할 수 없이 4229년(서1896)에는 압록강 건너인 서간도 통화현 오도구(五道溝)로 들어갔다. 서간도에 대한 유인석 의병장의 인식은,유인석


 “조선과 청국의 사이에 있는 서간도에는 수십 년 전 청국인이 처음 거주하기 시작했지만, 우리 조선인도 근래에 와서 기근 등으로 인해 나라에서 금하는 것을 무릅쓰고 이주 정착한 수가 만여호를 헤아리게 되었다. 그래도 나머지 땅이 커서 가히 몇 만 호를 받아들일 만하고, 토지가 심히 풍요로워서 한 사람이 경작하면 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1년 경작하면 삼사 년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그 곳에는 인의지계(仁義之計)가 있으므로 가히 나라의 흥복지계(興福之計)가 가능하다.”


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의견은 그대로 본토 내의 의병진에도 퍼지게 되었고, 따라서 차후의 의병항쟁에서 일제에 밀린 의병들이 서간도로도 많이 옮겨 와서 활동했다. 그 후로도 유인석 의병장의 뜻을 이은 전덕원․백삼규․조병준 등의 의병진이 관전(寬甸)과 환인(桓仁) 등지로 옮겨 와서 농무계(農務契)․향약사(鄕約社) 등 준자치적 단체들까지 만들고 본토수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유인석 의병장 자신은 대한국이 자리 잡아 가던 4230년(서1897) 8월에 광무황제의 부르심에 응하여 평안북도 초산으로 돌아 왔으나, 그 곳에서 황제께 드리는 국정쇄신을 위한 상소문만을 올리고 알현은 하지 않았다.. (126-527)참조.


 그 후 10여 년간 압록강을 넘나들며 많은 후학들과 독립투사들을 배출한 그는, 을사늑약 사건이 발생하자 전국의 유림에게 전 국민이 분발하여 궐기하기를 촉구하였고, 4239년(서1906)4월에는 망명하려고 하였으나 질환이 깊어서 일단 미루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요양하고 있던 중에, 4240년(서1907) 봄에 광무황제로부터 밀지(密旨)와 밀부(密符:의병장으로 임명하는 징표)를 받았으나 자신의 건강 때문에 명령을 받들 수 없음을 이유로 들어서 돌려보냈다.. (142-192)참조.
 
  그러나 정미늑약이 강제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 이상 병상에 누워 있을 수 없게 되어 서울과 개성에서 의병봉기를 촉구했으며,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에 한계가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그는 더욱 확고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병든 노구를 이끌고 북간도로 재차 망명을 떠났다가 다시 연해주로 이동하여 자리를 잡게 되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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