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문길 역사소설 옥전여왕(玉田女王)] 성왕의 죽음 8회

안문길 | 기사입력 2018/11/08 [15:30]

[안문길 역사소설 옥전여왕(玉田女王)] 성왕의 죽음 8회

안문길 | 입력 : 2018/11/08 [15:30]

 [안문길 역사소설 옥전여왕(玉田女王)] 성왕의 죽음 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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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티산성에서 성왕을 보필하며 전장을 지휘하고 있는 고위 관리들은 마음이 조급하였다.

 

시간을 너무 길게 끌고 있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저들이 재정비하기 전에 진격하여 멱줄을 끓어놓아야 할 것입니다.”

 

내두 좌평 백순이 한시 바삐 적의 숨통을 죄어 놓아야 한다고 열을 내었다.

 

저도 좌평님의 의견에 찬동합니다. 시간을 벌이면 교활한 저들이 어떤 술책을 써서 우리를 공격할지 모릅니다. 지금이 적기이니 지체 말고 공격을 감행하여 적의 숨통을 조여야 할 것입니다.”

 

나솔 견성이 일어나 지금 곧바로 달려가 적을 괴멸해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조금 더 기다려 보세. 환산성에서 조만간 기별이 올 걸세. 요즈음 저쪽에서 소식이 없는 걸 보니 대장군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계책을 짜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네.”

 

성왕은 성급히 결판을 지어야한다고 열을 내고 있는 휘하를 진정시켰다.

 

그런데 최전선을 지휘하고 있는 대장군 진영에서 전갈이 왔다. 대장군 여창이 그동안 전쟁을 치르느라 먹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힘이 쇄진하여 몸져 누워있다는 소식이었다.

 

난감한 일이로다. 이런 귀중한 시기에 대장군이 쓰러져 있다니. 이 보게들 내 잠시 가서 대장군을 뵙고 위로하고 올 테니 진중을 잘 지키도록 하게.”

 

성왕은 곧 환산성으로 떠날 차비를 하였다.

 

대장군이 몸져누우셨다는데 어찌 임금님 홀로 문안을 가시려 하십니까? 저희들도 같이 가겠습니다.”

내신 좌평 길신이 일어서며 성왕과 같이 동행하겠노라고 나섰다.

 

그렇습니다. 전장에 나온 것은 구차히 자기 한 목숨을 건지러 나온 것이 아니옵고 생사를 같이하고자 결의를 다지며 나온 것입니다. 대장군이 병환으로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저희라고 진중에 편히 앉아 걱정만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대장군을 직접 찾아 뵙고, 같이 아픔과 위로를 나눌 것입니다.”

 

내신 좌평이 나서자 내두, 내법, 위사, 조정, 병과 좌평도 함께 같이 문안할 것을 주장하며 나섰다.

 

저희도 같이 갈 것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솔, 한솔, 달솔들도 나섰다.

 

당장 죽을 병도 아닌 것 같은데 너무 성급히 나서지들 말게나. 그대들의 생각이 정 그러하다면 먼 길도 아니니 몇 명의 좌평과 나솔들과 동행하도록 하지. 내신 좌평이 알아서 동행할 사람을 선정해 보도록 하게나.”

 

성왕은 선발대 다섯 명, 후발대 다섯 명의 기병 그리고 좌우로 각각 열 명씩의 전투기병을 배치하여 호위 하도록 하고 말위에 올랐다.

 

병문안에 나선 사람들은 좌평 중 내법, 위사 두 명을 뺀 네 명, 그리고 나솔, 한솔들 열 두 명과 사역병 세 명으로 이루어진 임금의 행차로서는 조촐한 나들이 행렬이었다. 행장을 갖춘 일행은 곧 태자가 앓고 있는 환산성을 향해 고삐를 당겼다.

 

그칠 것 같지 않게 수북이 쌓이던 눈도 성왕일행의 행차를 알았는지 눈발을 멈추고 가랑눈만이 하나둘 흩날리고 있었다.

 

성티산성과 환산성은 오십여 리 떨어져 있고, 양쪽 산성을 오가는 길은 백제군의 보급로로 성왕도 몇 번 왕래한 적이 있는 낯익은 길이었다. 더구나 신라군은 멀리 삼년산성 쪽으로 패주하여 갔으므로 일행은 아무런 생각 없이 여유롭게 환산성을 향해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하늘도 구멍이 뚫리어 먹구름 사이로 나타난 별들이 얼굴을 내밀고 인간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들이 떠 있는 하늘 위에서 보면 성왕 일행의 행렬이 창파에 뜬 일엽편주처럼 흰 눈의 바다 위를 조그만 쪽배가 풍파를 헤치며 앞을 향해 힘겹게 지쳐나가는 모습처럼 보일 것이다.

 

이른 저녁인데 별이 떴네요. 하늘도 우릴 위해 길을 열어 주는가 봅니다.”

 

나솔 하나가 구름 사이로 비춰 보이는 별을 보며 즐거워하였다.

 

바다가 그렇듯 하늘도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되네. 언제 어느 때 폭풍이 몰아칠는지 알 수 없으니까.”

 

옆에서 말고삐를 당기며 조정좌평이 나솔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랬다. 조정좌평의 말대로 엄청난 폭풍이 성왕의 일행 앞으로 몰아쳐오고 있었다.

 

신라는 신주 성주인 김무력 부대를 삼년산성으로 남하시키고 백제 연합군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성왕이 군을 장악하고 있는 성티산성과 태자 여창이 주둔하고 있는 환산성 사이의 보급로가 어디인가를 파악하여 이 통로를 끊기 위해 구진베루에 쥐도 새도 모르게 정예 기병을 배치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구진베루는 백제군 쪽에서 보면 높은 암벽이 우뚝 솟아 있어 군대가 움직일 수 없는 지형이었기 때문에 방어벽 역활을 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뒤편은 넓은 터가 있어 많은 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곳으로 신라쪽 에서는 요새와 같은 곳이었다. 더구나 꼭대기에 오르면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백제의 군영이 한 눈에 들어와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김무력 장군은 삼년산성의 비장 고간 도도에게 구진베루를 지키며 적의 움직임을 세밀히 살피도록 명령하였다.

 

고간도도는 말 먹이를 마련하는 임무를 맡은 벼슬아치로 어릴 때부터 질 좋은 풀을 찾아 이곳 산야를 돌아다녔기 때문에 주변의 산하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낱낱이 꿰뚫고 있었다. 그런 도도의 눈에 멀리 한 떼의 행렬이 성티산성에서 나와 환산성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구진베루 가까이 올수록 그들의 모습이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는데 울긋불긋 갑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전투병은 아닌 것 같았고 주위에 십 여 명의 기병만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고간도도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도도는 정예기병 삼백을 풀어 요소에 배치하고, 길목을 지나는 성왕 일행을 급습하였다.

 

뜻밖에 몰려든 삼백의 신라정예기병을 십 여 명의 호위병이 맡기란 중과부적이었다. 성왕일행은 고스란히 신라기병에게 포박되고 말았다. 처음 백제행렬을 체포했을 때 고관도도는 그저 평범한 백제의 관리들이려니 생각하고 그들의 정체와 임무가 무엇인지를 물으려 하였다. 그러나 거기에 적국의 괴수 성왕과 함께 자평, 달솔, 은솔 등 전쟁수뇌부들이 한 무리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고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간 도도는 곧 삼년삼성을 지키고 있는 김무력 장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국가 흥망의 열쇠를 쥐고 있는 김무력 장군은 적의 수뇌부가 일망타진되었다는 소식에 접하자 그의 귀를 위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백제군이 쳐들어온다면 어디서 어떻게 막을까를 전전긍긍하며 고심하며 있었던 터였다.

 

천우신조로다.”

 

김무력 장군은 곧 말을 달려 구진베루로 내려갔다.

 

도도의 전갈대로 구진베루의 옥안에 성왕을 비롯한 백제의 고위관리들이 고스란히 잡혀와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는 전장이다. 우리의 수만 병사의 원혼이 이 강산을 떠돌고 있다. 모조리 참수함이 마땅하다.”

 

김무력 장군은 성왕을 비롯한 포로전원을 참수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목을 창에 꿰어 적에게 보임으로서 적의 사기를 떨어뜨릴 것을 지시하였다.

 

하오나 아무리 적이라 할지라도 왕의 목을 벤다는 것은 국가 간의 일이오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볼일이옵니다. 이일로 적의 분노를 산다면 오히려 물불을 가리고 달려드는 적을 감당키 어려울 것입니다. 국왕께 전하여 판단을 내리시게 하심이…….”

 

옆에 있던 책사 은집이 김무력 장군에게 이 사실을 진흥왕에게 알릴 것을 종용하였다.

 

책사의 말을 들은 김무력 장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 자리에서 서찰을 써서 파발에게 전하였다.

 

이 밤 안으로 돌아오도록 하라.”

 

파발은 김무력 장군의 서찰을 품에 넣고 금성을 향해 급히 말을 달렸다.

 

여래께서는 이 몸과 머금은 꿈을 함께 버리시나이다.”

 

한 치의 앞도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 했거늘 이제 와서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해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하늘은 성왕과 백제를 함께 버린 것이다. 성왕은 깊은 탄식과 함께 머리를 떨어뜨렸다.

희끗희끗 내리던 눈이 다시 함박눈이 되어 황룡사 뜨락에 쌓였다.

 

진흥왕은 국사, 법사, 수행원 몇 명과 함께 황룡사 뜰을 거닐고 있었다. 앞 일이 장막에 가려 예측할 수 없이 불안하기만한 나날을 부처님 자비에 의탁하여 풀어 나가려하였다.

 

성왕이 곧 금성을 치러 올 것 같소?”

 

진흥왕이 옆에 있는 각간 위홍에게 물었다.

 

지금의 형세로 보아 그럴 공산이 없질 않사옵니다.”

 

각간 위홍은 성왕이 복수를 하기 위해 금성으로 쳐들어올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저들의 군사가 우리의 배가 넘으니 감당키가 힘들 것 같구려. 군사를 더 늘릴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진흥왕은 가야군과 왜군까지 합세하여 늘어난 백제군에 대해 심히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미 전국 방방곡곡에서 젊은이란 젊은이는 모두 징집한터라 더는 군사를 늘릴 방법이 없는 줄 아옵니다.”

신라는 진성과 관산성 전투에 패한 후 전국의 젊은이들을 모두 징집하였으므로 더는 군대를 보강할 자원이 없었다.

 

진흥왕이 황룡사 뜨락에서 각간들과 국가안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전방을 지키고 있는 김무력 장군에게서 전간이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진흥왕은 문득 가슴이 내려앉았다.

 

성왕이 이미 행동을 개시한 것인가? 아니면 진중에 소란이라도 일어난 것인가?‘

 

웬만한 일이면 스스로 행동하는 김무력 장군이 파발을 보낸 것에 대해 진흥왕은 심히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발이 내민 전간을 펴본 진흥왕은 부르르 몸이 떨렸다.

 

내 잠시 법당에 드르리라.”

 

진흥왕은 법당에 들어 가부좌를 개고 앉아 본존과 마주하였다. 진흥왕은 깊은 참선 끝에 말문을 열었다.

정년. 성왕과 백제를 이 몸에게 주시는 것이옵니까?”

 

억겁의 시간이 흐르 듯 오랜 고요가 법당을 감싸고 돌았다. 그 속에 소리가 있었다.

 

일체가 어제 밤 꿈과 같으므로 생사나 열반이 생겨나거나 멸할 것이 없으며 오가나 갈 것이 없다. 증득된 원각도 얻거나 잃게 될 것이 없고, 취하거나 버릴 것이 없다. 일체의 법성이 평등하여 허물어지질 않는다. 어떠한 법에도 묶이지 않고 해탈하지 않으며 생사를 싫어하지도 열반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세상은 승패가 목적이 아니라 패승이 좌우할 것도 없다. 인간의 일은 인간에게 맡겼으니 주어진 대로 행하되 불자의 존엄을 잃지 않기 바라노라.”

 

진흥왕은 또 한동안의 참선에 잠긴 후 법당을 나왔다. 이제 무언가 단안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진흥왕은 붓을 들고 자신의 뜻을 종이에 써 내려 갔다.

 

이 서찰을 김무력 장군에게 전하라. 밀서이니 읽은 즉시 불에 태워버리도록 아뢰어라.”

 

진흥왕은 친서를 써서 파발에게 주어 보냈다.

 

 

덧없이 하룻밤이 지나갔다.

 

성왕. 우리 젊은이 오천이 희생되었소. 이번 전쟁의 책임을 물어 왕의 목을 베겠소.

도도, 너의 임무가 막중했으니 네 스스로가 성왕의 목을 자르도록 하라.“

 

김무력 장군이 고간 도도에게 명령을 내렸다. 구진베루 뒤뜰엔 어제 생포한 백제의 수뇌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노비인 제가 어찌 감히 왕의 목을 자르겠나이까.”

 

도도가 머리를 조아렸다.

 

전장에서 상관의 명을 거스름은 칠족의 멸함이다. 당하겠느냐? 이제 천한 노비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목 베임으로써 이 일이 후세에까지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김무력 장군의 명은 지엄하였다. 도도는 칼을 들고 성왕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엎드려 세 번 절하였다.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

 

도도가 성왕에게 아뢰었다.

 

왕의 머리를 노비에게 줄 수 없다. 베려거든 너 김무력이 베거라.”

 

병관좌평이 고개를 쳐들고 김무력 장군에게 소리쳤다.

 

노비가 오찌 장군의 명을 어길 수 있겠사옵니까. 우리나라 법에서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국왕이라 할지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

 

도도가 칼을 높이 쳐들었다.

 

지상을 보셨나요? 도도가 천륜왕의 목을 베려고 합니다. 어찌 보고만 계시옵니까?”

 

천상에서 십일면관음보살이 여래를 급히 찾았다.

 

업보입니다.”

 

여래께서 담담히 말하였다.

 

하지만 천륜왕은 수많은 사찰을 세우고 평생 불가를 위해 몸 바쳐온 불덕 높은 불자가 아니옵니까? 어찌 하찮은 노비의 손에 죽음을 맡기시옵니까?”

 

십일면 관음보살은 마음이 아팠다.

 

도둑떼에게 목숨을 잃은 이 몸의 전생을 모르시나요? "

 

여래가 십일면관음에게 물었다. 여래의 전생을 잘 아는 십일면관음은 할 말을 잃었다. 여래는 다시 참선에 들었다.

 

진흥왕이 열쇠를 쥐었으니 그의 불심에 맡겨봅시다.”

 

여래도 눈을 감고 침묵하였다.

결국 성왕은 도도의 칼 아래 한 점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청운의 뜻을 품고, 백제 중흥의 기치를 높이 세워 나가던 성왕은 예기치 못한 사소한 실수로 자신의 죽음과 좌평 네 명, 달솔, 운솔들 십여 명과 함께 불귀의 객이 되어 그 뜻이 꺾이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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