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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77)- 의병궐기와 남한의 대학살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5/09 [11:39]

대한정통사(77)- 의병궐기와 남한의 대학살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5/09 [11:39]

[플러스코리아-안재세 역사전문위원] 서울에서 시위대가 봉기하여 낭패를 본 일제는 그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애초에는 해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대한국군 장교들에 대한 해산마저 8월 13일에 강제로 실시하였으며, 지방진위대에 대해서도 해산령을 내리는 등 그동안 그 나마 쓰고 있던 가면까지 벗어던지고 적나라하게 침략의도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일제의 야욕이 그처럼 노골화되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장병들과 의병들이 총궐기했으니, 바야흐로 일제와의 선전포고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전국 각지의 의병들은 해산당한 대한국군과 힘을 합하여 독립전쟁을 보다 능률적으로 수행하게 되었으니, 이 강년, 허 위, 이 인영, 민 긍호, 전 해산, 이 은찬, 김 수민, 한 봉수, 안 규홍, 기 삼연, 심 남일, 신 돌석, 홍 범도 등의 용맹무쌍하고 대의(大義)에 밝은 의병장들이 살신성인하는 기백으로 대한국강토의 곳곳에서 독립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 의병장 리강년     © 편집부

 

  이 때 광무황제는 이미 유폐상태에 처해져 있기는 했으나, 10여년 전 을미왜란을 징벌코자궐기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여러 의병장들에게 밀사들을 보내어 의병궐기를 독려했다. 일찍이 을미의병으로 용맹을 떨쳤다가 문경지방에서 다시 궐기한 이 강년의병장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4240년(서1907) 8월에 판서 심 상훈은 다음과 같은 광무황제의 밀교를 받들고 일찍이 선전관을 역임한 운강 이 강년의 의병진에 와서 전달하였다.

 

“오호라!

   짐의 죄가 크게 차서 황천(皇天)이 돕지 않노라.

   이로 말미암아 강한 이웃이 혼란을 일으켜 엿보고 있고, 역신(逆臣)이 정권을 농락하여 사천년 종사와 삼천리 강토가 일조(一朝)에 견양(犬羊)의 것이 되었노라. 짐의 한 오라기 목숨은 애석할 바가 없으나 오직 종사와 생령을 생각하니 애통하여, 이에 선전(宣傳) 이 강년으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칠로(七路)에 보내노라. 양가재자(良家才子)로 하여금 각기 의병을 일으키게 하여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아 인부(印符)를 스스로 새겨 종사하게 하노니, 만약에 명령에 복종치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등을 먼저 참하고, 파출(罷出)하여 처분하라. 기보(畿保)를 보존하는 한오라기 희망이 이(李)도체찰사가 사직에 순(殉)함에 달렸노라.

   이에 새서(璽書)를 비밀리에 내리니 이를 알고 거행하라.“

 

 

▲ 의병장 허위     © 편집부

 

   그와 같은 밀교를 전달받은 이 강년은 눈물을 흘리며 일사보국을 다짐했고, 수하 장졸들을 불러 모아 밀교를 엎드려 읽어주며 의병들의 사기를 돋구었던 것이다. 비록 왜구들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당하기 했지만, 광무황제는 더욱 더 의병들의 전폭적인 신뢰의 대상이자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광무황제의 밀교마따나 순국을 각오한 이 강년의병장은 제천의 의림지에 있는 영호정에서 여러 의병장들의 추대로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이 되어 영남 일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심 상훈은 4239년(서1906) 겨울에도 영월의 배양산에서 진치고 있던 이 강년의병장에게 갑옷과 이불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려 한 적이 있었는데 이 강년의병장은,

 

“대감께서 이렇게 후한 물건을 주시니 황감하오나 군사들이 춥고 굶주려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저 혼자만 이 물건을 사용한다면 천지신명이 어찌 저를 벌주지 않겠읍니까? 감히 사양합니다.”

 

하고 받지 않았다. 이에 심 판서가 그의 인격에 감동해서 곧 쌀과 베등을 보내어 의병들을 위로한 후 그 사실을 광무황제께 아뢰었으므로 황제는 심중에 그를 도체찰사로 삼으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 의병장 리인영     © 편집부

 

   연이어서 황제의 밀지를 받고 사기가 충천해진 의병들의 활동은 4240년(서1907) 8월 20일 이후에 더욱 증폭되었다. 특히 광무황제의 칙서를 받은 바 있고 전국 의병들의 총대장격인 13도 창의대장에 추대된 이 인영은, 4240년(서1907) (음)9월에 서울주재 각국 영사관에 호소문을 보내어 광무황제의 칙서를 명시하면서 의병전쟁의 합법성과 국제법상의 교전단체 승인을 요구하였으나, 일제와 한 통속이나 다름없었던 제국주의 각국들로부터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 인영은 또한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해외동포들에게도 발송하였다.

 

“동포여러분,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조국에 몸을 바쳐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 야만 일본인의 잔혹한 만행과 불법행위를 전세계에 호소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교활하고 잔인하여 진보와 인간성의 적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모든 일본인과 그 주구들과 야만적인 군대를 사살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국내외적으로 ‘독립전쟁’을 선언한 이 인영은 4240년(서1907) 12월(음11월)에 전국의 의병들에 격문을 보내어 그 달 안으로 경기도 양주로 모든 병력을 집결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에서 모인 의병은 약 만여명에 달했으며 그중에 해산당한 장병도 3천여명이나 되었으므로 곧 서울탈환 작전이 수립되었다. 그런데 이 때 마침 총대장 이 인영의 부친이 사망했다는 급보가 들어와서 이 인영은 장례식을 치르기 위하여 귀향하게 되었고, 작전은 군사장인 왕산 허 위가 맡게 되었다.

 

 

▲ 의병장 민긍호     © 편집부

 

   일찍이 광무황제는 평리원판사와 의정부참찬및 비서원승 등 고관대작을 역임한 허 위의 진충보국하는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다.

 

   헤이그에 밀사들을 보내던 시기를 전후해서 일제의 침략을 결국은 무력으로 몰아낼 수 밖에 없음을 통감하신 광무황제는, 허 위에게 4240년(서1907) 4월에 ‘거의(擧義)’라고 쓴 의대조(依帶詔)를 내린 바 있었다. 그에 따라서 허 위는 반년여동안 비밀리에 철저히 준비한 후 9월에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토왜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오고 있던 중이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황제께도 직언하기를 서슴치 않았던 대쪽같이 곧은 성격의 허 위는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코자 하였다. 그러나 작전자체가 신문에 상세히 보도될 정도로 적에게 노출된 데다가, 잔뜩 대기하고 있던 일제의 집중공격을 받은 선발대가 후속부대와의 연락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 의병장 전해산     © 편집부

 

   일단 작전상 후퇴한 허 위는 대규모 병력의 운용이 오히려 비효과적임을 절감하고 소규모의 게릴라전에 돌입하여 의병들은 곳곳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두 번째로 서울탈환작전을 준비하고 있던 허 위의 은신처가 일제에게 발각되어 허 위는 단기4231년(서1908) 6월 11일에 체포당하고 말았으며, 그에 따라서 의병활동에도 많은 차질이 빚어지게 되고 말았다. 후일에 이등을 총살한 안 중근의사는 허 위선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우리 2천만 동포가 허 위선생과 같이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용맹한 기상을 가졌더라면 오늘날의 나라의 욕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 의병장 이은찬     © 편집부

 

   이 강년의병장도 허 위의병장과 함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했다가, 가평과 양주에서 우수한 장비로 완전무장한 일제의 기습공격을 받고 추격당한 끝에, 4231년(서1908) 6월 4일에 역부족으로 체포당하여 애통하게도 순국하고 말았다. 이 강년의병장은 일찍이 경상북도 순흥에서 용맹한 평민의병장 신 돌석을 만났는데, 신 돌석의 용감성에 감탄하여

 

“참으로 장사로다. 나는 그렇지 못하니 물러나고 당신을 추대하여 양도도의장(兩道都義將)으로 삼겠다.”

 

고 높이 추대하려 할 정도로 인물을 잘 알아 보면서도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소탈한 성품이었다. 이처럼 충의에 빛나는 의병장들은 하나같이 모범적 인격자들이기도 했다.

 

 

▲ 의병장 한봉수     © 편집부

 

   대한국의 대다수 민중은 의병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후일의 베트남에서 벌어졌던 게릴라전보다 반세기가량 앞서서 시범을 보인 대한국의 게릴라적 의병투쟁은 실제로 일제침략자를 몰아내기 위한 엄연한 범민족적 독립전쟁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치열한 총력전을 통하여 의병들은 곳곳에서 적지않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으니, 황 현은 당시의 전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관동,호서,영남지방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나고 서울 동쪽에 있는 모든 군(郡)에서도 일시에 호응하니, 일본은 연달아 정병을 파견하여 나가게 하였다. 그런데 지형에 어두워서 진퇴의 적기를 놓쳤으며, 의병은 새로 일어난 기세로 부인들이 나무와 돌을 운반하고, 노약자들은 술과 간장등을 가져다 주고, 의병들은 천리에 연이어 둘러 있으며, 험한 곳에 웅거하여 출몰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군은 분명(奔命)을 따르기에 피곤하여 왕왕 패몰하였다. 그러나 그 패한 것을 꺼려 우리 국민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원주에서 죽은 것이 제1차 싸움에서 2백여명, 제2차 싸움에서 4백여명이었고, 충주에서 전사한 인원이 6백여명으로 사망자의 목을 베어 선척에 가득 싣고 양근강에서 떠나 서울에 들어온 것이 무릇 4,5척이나 되었다.”

 

 

▲ 의병장 안규홍     © 편집부

 

   오로지 무력에 의해서만 자주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졌던 광무황제는, 강제양위당하기 전까지 각 처의 의병장들에게 칙명과 함께 군자금을 보냈으며, 해외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은밀하게 보조를 했다. 즉,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에 있어서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정규의 대한국군이 일제의 철저한 통제하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의병을 일으켜서라도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독립을 지키고자 했던 광무황제의 칙명 또는 밀명을 받은 의병장들은 한 둘이 아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황명을 받들어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아니하고 용맹분투함으로써 구국투쟁의 선봉에 섰던 것이다. 의병은 바로 국가재정상 많은 정규군의 양성이 불가능했던 대한국의 '숨겨진 군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 의병장 신돌석     © 편집부

 

   이와 같이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증폭되어 간 의병들의 독립투쟁은 다음 해 봄까지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그에 따라서 지방의 모든 통치기구들의 기능이 마비됨에 따라서 거의 전국적인 무정부상태에 빠져들어 갔다. 도저히 의병들과의 전쟁에서 이길 가망성이 없어지자 일제는 마침내 그 잔악한 본성을 드러내어, 인류사회에 그 때까지는 알려진 바도 없던 가히 지옥도를 연상케 하는 온갖 만행을 대대적으로 자행하기 시작하였으니, 만행의 대상은 포로가 된 의병들뿐만 아니라 의병들을 도와 준 혐의가 있는 촌락과 촌락민들, 심지어는 의병들이 하룻밤 쉬고 간 집이나 마을등도 학살과 방화로 인한 초토화를 면치 못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 참혹한 정황에 대해서는 영국인 기자 맥켄지가 ‘대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제천은 4240년(서1907) 늦여름 무렵까지는 인구 이삼천명 정도였고,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분지로서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중요한 지방도시였다.그 곳은 고관이나 귀족들이 즐겨 찾는 행락지였으며, 마치 영국의 휴양지 배쓰(Bath)나 첼테남(Cheltenham)과 같은 곳이었다. 규모가 큰 집이 많고 기와집도 많아 확실히 부유한 도시였다. 의병이 행동을 개시했을 때 그 일부는 제천 맞은 편의 산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제천을 지방민들에 대한 징계의 본보기로 할 것을 결의했다.

 

   거리 전체가 횃불로 화하고 불바다가 되었다...거리에는 불상 한 개와 관아 한 채가 남았을 뿐 모조리 불에 타버려 무엇 하나 남지 않았다...이렇게까지 완전히 파괴된 것을 이전에 본 일이 없었다...완전한 벽 하나, 기둥 하나, 된장항아리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제천은 지도위에서 싹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또한 다른 신빙할 만한 기록들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천인공노할 만행도 전해져 오고 있다.

“..강원도에서는 의병을 생포하여 열탕에다 삶아 죽이고 의병장의 부인을 잡아 와서 음문에 숯불을 넣어 태워 죽이고, 또 도시의 개를 박멸하고 마을의 닭을 잡아 13도 강산에 개와 닭의 소리가 끊기었다..”

 

   이러한 만행속에서도 전국적 의병항쟁은 3년이상을 끌어갔으나 민중세력이 급속히 피폐화되어 가는 상황에서는 결국 한계에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 일제의 만행에 의하여 고향을 등지고 만주와 시베리아등지로 떠나가는 유랑민이 급속히 증가해 갈 수 밖에 없었던 것도 필연적인 현상이었으니, 4240년(서1907) 11월 26일 자로 이미 북한에서만 10여만명의 농민들이 노령(露領)으로 이민길을 떠나갔던 것이다.

 

   일찍이 간도관리사였던 이 범윤은 연해주에서 해외독립투쟁의 봉화를 올렸다. 이 범윤은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대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고 러시아군측에 가담해서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노일전쟁후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고 4240년(서1907)에는 간도에 일제의 파출소까지 생기면서 간도에서의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노령 연해주로 망명했는데, 국내에서의 의병전쟁 개시와 함께 연해주의 교포들과 힘을 모아 신식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제와 그 주구들을 공격했다. 간도에서의 의병활동은 소위 ‘간도협약’에 의하여 일제가 간도에서 철수한 4242년(서1909) 9월부터 다시 본격화될 수 있었다.

 

그  러나 연해주라고 해서 독립운동을 마음놓고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이미 포츠머스 조약에 의거하여 만주의 이권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노일 양국은 모두 당분간은 국제적 분쟁을 원치 않고 있었기때문에, 러시아당국으로서도 대한국독립군의 존재는 대단히 거북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노일 양국의 견제를 받으면서 연해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하기는 그리 용이하다고 볼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범윤을 위시한 독립군은 꾸준히 그 세력을 확장해 갔다. 일제와의 관계를 시종 염두에 두어야만 했던 러시아정부의 어중간한 입장과는 달리, 연해주 현지의 러시아인들이나 러시아군은 치욕적이었던 노일전쟁의 설욕을 위해서도 대체로 대한독립군에 호의적이어서, 독립군이 신식무기를 비교적 용이하게 입수할 수 있었던 점이 이 범윤 휘하 독립군의 전력을 증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의병독립투쟁이 예상과 달리 끈질기게 지속되자 ‘합병’을 할 명분을 얻지 못하게 되어 극도로 초조해진 일제는, 마침내 4242년(1909) 9월1일부터 2개월여에 걸쳐서 우선 의병활동이 극렬하게 전개되고 있던 대한국의 남반부(남한:특히 전라남도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대침공을 기도하였으며, 이어서 4243년(서1910) 9월말부터 40여일간은 황해도에서도 같은 침공을 감행하였다. 마치 그물을 치듯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닥치는 대로 양민학살과 촌락방화를 자행하면서 의병들이 발붙일 곳이 없게 샅샅이 수색하며 감행한 일제의 총공격에 의하여 의병들의 전력은 급격히 약화되고야 말았다. 당시의 처절했던 상황을 매천야록은 이렇게 전한다.

 

“사방을 그물치듯 해 놓고 촌락을 샅샅이 수색하고 집집마다 뒤져서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죽였다. 그래서 길에 나다니는 사람이 없고 이웃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의병들은 삼삼오오 도망하여 흩어졌으나 몸을 감출 데가 없어서, 강자는 돌출하여 싸워 죽었으나 약자는 기어서 도망하다가 칼을 맞았다. 이리하여 무려 수천명이 죽었다...”

 

  남한대토벌의 잔학상에 대해서는 심지어 당시 전라남도 일대를 시찰하고 돌아 간 일제 중의원 의원인 대내(大內:오우찌)마저도,

“일본군의 남한대토벌 작전이 과연 사회인도상 정당하게 행해졌는가 의심스럽다...”

는 증언을 남기고 있을 정도였다. 이 대 침략전에 의하여 의병장이 103명이나 체포되거나 사살당했고 2천여명의 의병이 체포당하였으니, 전체 사상자가 얼마나 되는 지는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방이후까지도 수년간이나 의병의 독립투쟁은 끈질기게 이어졌으니, 심지어는 4252년(서1919)의 삼일운동 때까지도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은 이어져 갔던 것이다. 4247년(서1914)에는 임 병찬을 위시한 54명의 의병출신자들이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하여, 이미 작고한 의병장들의 유족들및 생존하고 있던 의병장들과 비밀리에 연락하여 전국적 규모의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결성하여 다시끔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투쟁에 나서려 하였으나, 매국적인 밀정들에 의하여 사전에 탐지되어 검거당하는 비운에 처하였고, 임 병찬은 거문도에 유배되어 4249년(서1916) 5월에 유배지에서 한많은 의병장으로서의 일생을 마치기도 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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