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가 부평집으로 찾아온 것은 대학 이년 여름방학이었다
방학이라고는 하지만 6.3사태로 계엄령이 내려져 군대가 교정을 장악하고 학생들 출입을 막았으므로 이미 두 달 전부터 학교는 휴교 상태였다.
“갑갑해서 내려왔어. 뭐 서해바다에 무인도 같은 거 없니?”
명주는 간단히 차린 바랑을 내려 놓자 턱없이 무인도부터 물었다. 나는 명주를 인천 송도 개펄로 데려갔다. 송도는 세계에서 캐나다 해변 다음으로 간만의 차이가 심해서 9미터 높이의 수심이 해변에서 삼십리 이상 밀려나가기도 하는데 그러면 끝없는 시커먼 개펄이 속살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신비롭게도 이 시커먼 개펄에 신이 변을 한 방울 떨어뜨린 둣 바위섬이 아닌 노오란 흙 섬 하나가 오똑하니 육지에서 멀지않은 개펄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섬은 30미터 정도 높이에 둘레도 50미터가 미치지 못하는 작은 섬이었다.
그러므로 인근 바닷사람들에게는 별 쓸모없는 섬이었다. 하지만 바람을 타고 날아온 씨앗들이 푸른 옷을 입혀 사진 속 그림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었으므로 보는 즐거움으로도 정이 가는 섬이었다. 섬은 밀물 속에서는 발목이 물에 잠겨 있지만 썰물이 되어 물이 나가면 육지와 길이 열려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밀물이 시작된 지 얼마간의 시간이 되었는지 동네 꼬마들이 물길을 따라 걸으며 망둥이를 낚고 있었다.
“망둥이 잡는 거 구경하면서 슬슬 아이들 뒤를 따라가지.”
명주와 나는 신발을 벗어 배낭에 집어넣고 썰물에 발을 담갔다.
느릿느릿 걸어도 황소걸음이라더니 나가는 물이 별로 빠른 것 같지도 않은데 잠시 후 뒤를 돌아보니 떠나왔던 해변이 까마득히 보이고 멀찍이 보이던 섬이 코 앞에 와 있었다.
”자루같이 생겼다고 해서 오얀섬이라고 부르지. 올라가서 자리를 잡자구.“
나는 명주의 손을 끌어 섬 위로 올렸다.
“난 무인도라고 해서 배타고 아주 멀리 나가는 줄 알았지. ”
명주는 사뭇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러려면 배 하나를 통째로 빌려야하고, 요즈음은 태풍철이라 태풍을 만나면 열흘이구 한 달이구 섬에 갇혀 꼼짝 못하고 굶어죽기 십상팔구지. 여기서도 무인도의 운치를 느낄 수 있으니까 마음을 다잡아 보라구.”
나는 섭섭해 하는 명주를 달래며 섬 가운데에 있는 조그마한 동굴로 명주를 데리고 갔다.
“고등학교 때까지 여름이면 여기서 살다시피 했어. 망둥이 낚시도 하고, 수영도 하고, 개펄에는 먹을 게 많아 대합, 바지락 등 조개며 소라, 낙지도 있고, 꽃게도 잡히지. 이 동굴은 비바람을 피할 수 있어서 우리 학생들이 캠핑하기에는 안성마춤인 곳이거든 젊은 혼이 깃든 섬이라고 할까.”
명주와 나는 가지고온 거적을 바닥에 깔고, 초록색 군용 담요를 덮어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가지고 온 버너에 불을 붙이고 커피를 끓였다.
“들어와 보니 운치가 있어 보이네.”
명주가 커피 봉지를 뜯으며 다소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듯 쓸려나가던 물이 거미가 기어오듯 개펄을 비집고 다시 육지 쪽으로 스믈스믈 밀려오기 시작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기 시작했다. 구름을 감싼 해는 형형색색의 빛깔을 구름에 수를 놓아 하늘이 마치 오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화려 하였다.
“음, 추상화를 보듯 아름답군.”
명주가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감탄의 소리를 토해내었다.
“ 서해의 낙조는 동해의 일출보다 아름답지.”
나는 명주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내해까지 빠져 나갔던 썰물이 어느덧 오얀섬 코밑까지 밀려들었다.
“이러다가 섬이 꼴깎 물속으로 잠겨 버리는 게 아닐까? ”
명주가 우려 섞인 소리로 물었다.
“소심은... 고기 밥이 될 일은 없으니까. ” 나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명주를 안심시켰다. 해가 지자 곧 달이 떠올랐다. 중천에 오른 달은 대낯처럼 휘황하게 불타는 도시의 불빛과 어울려 파도 위에 모전을 깔았다. 옅은 굴속에서 박쥐가 버스럭 거렸다.
“우리 둘만 있는 줄 알았는데...”
명주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 수백만년, 이 조그만 섬을 근거로 서식하며 살던 놈들이야. 우린 잠깐 들렸다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지.”
나는 빨고 있던 담배를 명주에게 건넜다.
“하긴 그래,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나그네에 불과하지. 우린 어딘가를 항상 떠돌아야 하니까.” 비음 섞인 소리로 명주가 중얼거렸다.
“ 그 또, 낭만에 빠져들었군. 퇴폐적 낭만.”
“ 낭만이 아니야. 타고난 감성이지. 난 왜, 심층의 바닥에 애비의 그림자가 깔려 있는 것 일까?” 명주의 눈동자에 비친 출렁이는 파도가 눈물처럼 아롱 거렸다.“
명주답지 않은 소릴 하는군. 잠재의식 속엔 우리가 감지하지 못한 뭐든 가가 떠돌아다니지. 구태여 그걸 밖으로 끄집어 올려 가슴앓이 할 필요가 있을까?”
명주와 나는 잠시 대화를 멈췄다. 소리없이 내려 앉는 이슬에 묻혀 밤의 고요가 깔리려니 했지만 밀려드는 파도는 밤의 정적을 무참히 깨어버렸다.
“ 아까 바다를 향해 소리치던 그 ‘사란’이란 뮈야?“
잠시 침묵이 흐르자 내가 명주에게 물었다.
” 흥, 별거 아냐. 내 애인을 훔쳐간 기집애.“
명주가 담담히 말했다.”
“혼란스럽군. 원수를 사랑하란 말은 기억하고 있지만 연적의 이름을 그토록 애절히 부르다니.”
나는 달빛 틈에 비친 명주의 표정을 살폈다. 명주는 아직 타고 있는 꽁초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비벼껐다.
“그 놈년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지. 심리란 미묘해. 중학교 말까지 죽자살자 덤벼들던 놈이 고등학생이 되자 시선을 돌리더군. 여우같은 년한테. 난 별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녀남 관계란 미묘하더군. 짜식은 결국 년 쪽으로 돌아섰지.”
명주는 남의 말하 듯 투덜거렸다.
“그런데 애타듯한 부름은 뭐야?”
나는 명주의 내면을 알고 싶었다.
“그렇게 들렸나? 난 별 생각 없이 소리 친건데. 그래, 아무리 감추려하지만 잠재 의식 속에 도사린 감정의 격량은 숨겨질 수가 없는가봐. 사랑한 것만큼 증오도 크다는 것. 자신도 모르게 토해 버리려는 육체적 욕구인지도 모르지.”
명주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나 역시 명주의 내면을 들추고 싶지 않아 입을 닫았다.
만조가 가까워질수록 파도는 더욱 큰 소리로 섬을 때렸다.
“ 커피나 마시지.”
명주가 주전자에서 커피를 컵에 따라 나에게 건네 주었다.
화살처럼 세월이 간다더니 머리 위에 머물던 달은 어느 사이 수평선 아래로 기울고 명주와의 무인도 여름밤은 커피 향내와 함께 이렇게 지나갔다.
세상은 시끄럽게 돌아갔다.
일만명이 넘는 학생과 시민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청와대 외각까지 돌파하여 일본에 예속되는 매국적 한일굴욕회담을 전면 중지하라고 대통령을 향해 외쳐댔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 재건에 필요한 재원 조달과 한미일 간의 우방 관계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한일정상화 회담을 본격화 시켰으나 학생들과 야당 인사들은 일제 강점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의 강화는 졸속이며 일방적 치욕적 회담이라며 격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고등학교 대학생 야당 등 반대세력은 이는 정부의 정책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정권 퇴진까지 들고 나섰다. 경찰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박 정권은 급기야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데모 세력을 저지하기에 이르렀다.
실상 일제의 쓰린 강점이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은 국민들로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 징용자문제, 원폭 피해자 문제, 사하린 미귀환 동포문제, 약탈 문화제 반환문제, 역사교과서 왜곡문제, 35해리 전관수역 포기문제 등 수많은 난제들을 해결하지 않고는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일제와의 타협은 용납할 수 없다는 강한 집념이 내재해 있는 상황이었다.
정부는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7명을 구속하였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겁을 주었지만 불만족에 들뜬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계엄령하에서도 시위대의 위력이 식어들 줄 모르자 정부에서는 한단계 더 높여 위수령가지 선포하였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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